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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인천에서 버림받은 권투 선수 김충성
▲ 이성진 영화관광경영고교사

<연재를 시작하며>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이르는 격동의 인천은 네 차례 좌우익 세력의 판도가 바뀌는 이념의 갈등과 비극의 상처가 가장 심한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념의 갈등과 비극의 흔적은 인천 근현대사에도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나마 고일의 「인천석금」과 신태범의 「인천 한 세기」와 「개항 후 인천풍경」이 있어 인천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산이자 근현대 인천 인문학의 길라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천석금」이나 「인천의 한 세기」와 「개항 후 인천풍경」도 격동의 인천이 남긴 이념의 갈등과 비극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좌익운동을 하다가 우익으로 전향한 인물들이기에 이념의 한계를 분명하고 있고 그런 한계가 그들의 저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천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 중 좌익계열이나 좌익성향의 민족주의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배제하는 경우가 있어 온전한 인천 근현대사를 서술했다고 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분의 저서가 출판된 지 50년 또는 30년 이상이 되었지만 인천 근현대사의 정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천석금」이나 「인천의 한 세기」와 「개항 후 인천풍경」에서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배제된 역사를 찾아 다시 복원시키고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은 21세기 인천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자 의무가 아닌가 하는 사명에서 글을 쓰고자 합니다.

20세기 「인천석금」이나 「인천의 한 세기」와 「개항 후 인천풍경」에 갇혀 있는 인천의 근현대역사 풍경을 넘어서 더 넓고 다양하게 접근하는 초석이 되고자 지난한 인천 근현대 역사 풍경 기행을 출발합니다.

 

1929년 6월 22일 제2회 전조선 권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아직 권투 경기가 자체가 덜 알려져 있지만 주먹을 사용하는 경기라는 소문에 상당히 호기심을 갖고 1,0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출전 선수가 30명이었다. 대부분 YMCA 권투부 소속 청년이었다. 권투를 전혀 배우지 않은 주먹패도 몇 명 참가하였다. 그래서 경기 규칙을 전혀 모르는 주먹패들에 의해 격투기 같았다고 한다.(1996.12.7.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 최초 권투경기’)

이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는 보성고보의 안태경(미들급), 양정고보의 홍윤식(라이트급), 제주도의 신태영(페터급), 경성 제 2고보의 김충성(밴텀급), 보성고보의 이석산(플라이급) 등이었다.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밴텀급 경기로 경성제 2고보 학생 김충성과 수표교 주먹패 두목 김창엽과의 경기였다. 당시 수표교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폭이 넓고 부근에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 거지나 주먹패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 주먹패의 두목 김창엽이 자신의 주먹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 대회에 출전하였다.

인천출신이면서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교) 김충성은 몸집도 작고 생김새도 유순하였다. 이에 비해 김창엽은 몸짓도 크고 험상궂게 생겨 관객들은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고 김충성이 경기를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김창엽도 주먹 하나로 주먹패 세계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몸집이 작은 김충성을 얕잡아 보았다.

김충성이 링 위에 올라왔을 때 수표교 주먹패들은 YMCA 2층 베란다에 무리지어 앉아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김충성은 이런 야유에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유는 경기 전에 김충성의 스승이자 심판이었던 김영구가 주먹패 두목 김창엽의 결정적 허점을 파악하고 비밀리에 전술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시합을 시작되었다. 1라운드는 백중세였다. 2라운드는 불과 1분 20초 만에 예상 밖으로 김창엽이 넉아웃이 되어 링 밖으로 나가 떨어져 KO패를 당했다. 수표교 주먹패들은 김충성을 때려 죽인다고 소동이 일어났고 삽시간에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충성은 재빨리 경기장을 빠져 나와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충성에게 KO패 망신을 당한 김창엽은 YMCA권투부에 가입하여 정식으로 권투를 배웠다. 개과천선한 김창엽은 주먹패에서 손을 떼고 권투에 전념하여 일본 선수들에게 전승하여 동양참피온에 올랐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전택부. 1993. 종로서적. p.110~112)

김충성은 1926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창영교100년사, 부록 졸업생 명단. 인천창영초등학교총동창회. 2007. ) 그와 함께 졸업한 동기 중에는 유도선수 김수복과 인천체육계의 영원한 후원자 정용복이 있었다. 김충성은 졸업 후 경성 제2고보에 입학하여 YMCA 권투부에 가입하여 김영구로부터 권투를 본격적으로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YMCA가 주최하는 제2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밴텀급 우승자가 되었다. 그가 인천에서의 활동은 1929년 5월 5일 인천소년연합회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인천소년회 대표로 어린이날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한 것이 유일하다.(1929.5.7. 중외일보)

2014년 발간한 인천광역시사 제 4권 「인천 체육의 발자취」에서는 신태범박사의 기록에 의존하다보니 인천 출신 권투선수 김충성은 아예 누락되어 있다. 1930년대 초반 휘문고보 출신 권투선수 한태열도 있었는데 이를 누락시키고 단지 1934년 일본 전수대학 졸업한 제주도 출신 신태영이 인천무도관 관장 유창호의 요청에 의해 처음 권투선수 양성을 시작하였고, 그의 제자 김병옥이 신태영의 지도를 받아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있다.

편집부  press@inche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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