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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인천 무도관 유도 사범 및 수원 무도관 설립자, 권충일이성진(인천골목문화 지킴이 대표)
▲ 권충일 요시찰인물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권충일은 1904년 강화도 송해면 상도리 홍의마을에서 기독교인인 권신일과 황브르스길라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권신일은 1901년 강화도 교동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목회자였고 모친 황브르스길라도 전도부인으로 여성선교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07년 부친 권신일이 부평구역(현 계산중앙교회) 담당목사로 파송받아 1914년까지 시무하였다. 1914년 6월 조선감리교 연회에서 화도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받아 1920년까지 시무하였다.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2002)

권충일은 4년제 학제를 가진 영화남자소학교를 수료하였다.(1917년 영화학당 학적부) 그리고 6년제 학제인 인천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당시 상급학교 진학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학력인정 학교를 졸업하여야 만 했다. 1919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 10회 졸업하였다. 동기생 중에는 대법원장 조진만, 서울대 총장 신태억, 북한 부수상 이승엽, 3.1만세운동 주도자 이만용, 체육인 박칠복, 사업가 이창문 등이 있다.(창영교 100년사, 2007)

곧이어 배재고보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10회 졸업하였다. (배재80년사, 1965) 배재고보는 체육활동이 가장 활성화한 사립학교였다. 일제강점하에서 일본 학생과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과 소질을 겨눌 수 있는 분야는 체육활동 분야였다. 일제는 조선인 차별과 불이익을 주면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그래서 일본인과의 공정한 경쟁을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교육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적용되었다.

공정한 경쟁이 철저히 봉쇄된 식민현실에서 체육 분야는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다. 운동경기의 규칙이 있어 편파적 판정 시비는 있었지만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었다. 일본학생과의 경기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승리하거나 우승하면 일본민족에 대한 조선민족의 우월감으로 보여준 것으로 받아들였다.(배재학당사-중고사, 2013.)

배재고보는 운동경기를 통한 민족의식의 양양과 민족의식 고취 및 민족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이를 반영하기 위해 1925년부터 유도와 검도를 필수교과목으로 택하여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배재고보의 유도부와 검도부는 휘문고보, 양정고보 등 유도명문 학교와 경쟁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배재학당사-중고사, 2013.)

▲ 1928.7.3. 인천무도관 1주년 기념무도대회 기사 동아일보

권충일은 유도와 검도를 배재고보에 배웠다. 배재고보를 졸업한 권충일은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도와 검도를 배운 까닭에 우리나라 전통 무술 에 대한 관심을 갖고 택견을 사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온갖 탄압과 감시로 전통무술 택견이 사라졌다는 것이 전통무예사에서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권충일에 의해서 이런 정설은 깨졌다. 1928년 7월 1일 인천무도관 개관 1주년 기념 무도대회가 애관극장에서 열렸다. 인천무도관 사범 유창호의 개회사 그리고 설립자 강락원의 격려사가 있은 후, 각종 무술시합이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권충일의 택권시범이 있었는데 관객석을 꽉 채운 인천시민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동아일보 1928.7.3.)

1927년 강낙원에 의해 유도, 검도, 권투 등 각종 운동을 지도하는 인천무도관이 창립되었다. 운동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인천 지역 열혈 청년들이 대거 입회하였다. 배재고보를 나온 후 신화수리에서 교회 아동부 교육과 신화수리 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권충일은 배재고보 선배 이보운과 함께 인천무도관에 입회하여 유창호 사범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배재고보 재학시 유도, 검도를 교과시간을 통해 배워 유단자가 된 실력자였다.

1928년 인천무도관 유도 승급대회에서 권충일은 공인 3단으로, 이보운은 공인 2단으로 승급되었다. 권충일은 그해 인천 신정 표관에서 개최된 세계 권투선수 초청 유도 대 권투 국제경기에서 인천무도관 대표로 출전하였다. 경성 유도 라이구에게 판정패하고 인천무도관 이귀복이 팽팽하게 경기를 진행할 때, 경기에 투입되어 탁월한 기술로 상대 선수 조지를 압도하여 관객으로부터 열화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조선일보 1928.11.8.)이후 공인 5단 승급하였고 인천무도관 유도사범 유창호를 뒤이어 인천 무도관 유도사범이 되었다.

▲ 1929.4.19. 수원무도관 설립 관련 동아일보

1929년 4월 인천무도관 사범활동을 하던 권충일은 수원군 성내 북수리에 무도관을 창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관원 모집을 하였다. 수원 무도관 설립하기 위해 관원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수원경찰은 수원청년들에게 유도, 검도 등 무술을 통해 불온한 민족의식을 함양 고취한다는 혐의를 두고 4월 14일 권충일과 신간회 회원 권순희를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4월 17일 수원무도관 창립한다는 애초 계획을 불가피하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경찰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입회 회원이 30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그렇지만 수원무도관이 수원성문 밖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더 많은 회원을 수용할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그래서 1929년 6월 15일 조선일보 수원지국, 동아일보 수원지국 등 많은 언론사 수원지국, 수원여성단체 영우회 후원으로 수원 무도관 신축 기금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워 수원극장에서 음악무도대회를 열고자 하였다. 출연진은 경성, 인천의 일류음악가와 무용가였다.(동아일보 1929.6.14.)

수원경찰은 수원극장에서 수원무도관 신축기금마련을 위한 음악무도대회를 수원극장에서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무도관에서 음악무도회를 개최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연금지조치를 내려 결국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동아일보 1929.6.20.)

수원무도관은 수원경찰의 공연금지조치로 중단된 음악무도대회 대신 중소년야구대회를 6월 29일~30일 이틀 간 수원청년회 운동장에서 개최하여 수원 청년들에게 호응과 관심을 이끄는 계기로 삼았다.(동아일보 1929.6.24.)

그리고 수원경찰의 방해를 절묘하게 피해가는 방안의 하나로 6월 22일 수원무도관에서 권충일이 승급대회 심사를 하면서 동시에 무도대회를 열었다. 수원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권충일로부터 주로 신화수리를 중심으로 만석동에서 살던 아동, 청년들은 유도, 권투, 택견, 야구 등 각종 운동을 배웠다. 그리고 배재고보, 연희전문, 이화여고보, 이화여전, 협성신학교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이 화도교회 주일학교 또는 야학을 통한 연극, 웅변 등 문화예술 활동을 지도하였다. 이들은 이런 교육을 통해 강한 민족의식 및 노동자 사상을 배웠다. 그리고 청년운동으로 발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에서 수원무도관을 설립하고 수원지역 청년에게 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및 강한 배일의식을 갖게 하고자 하였고, 이를 간파한 수원경찰은 이를 강력하게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충일로부터 유도, 권투, 택견 등 격투기를 배우거나 야구, 축구, 정구 등 기구운동을 배운 아동과 청년들은 철저한 민족의식과 배일사상로 무장하는 열혈청년을 변모되었다.

1931년 인천 화교배척사건으로 체포된 전명준은 권충일의 수제자로 인천경찰은 그를 인천 사상계의 거물 권충일의 앞장이로 개전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무장된 열혈 민족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인천경찰에 의해 신화수리, 화수리 방면에는 불량청년들로 평가되었지만 강한 민족의식과 함께 배일정신이 강한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신화수리, 화수리에는 일본인들이 얼씬거리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이 이곳에 올 경우에는 경찰을 대동하고 방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혼자 왔다가는 이들에게 붙들려 골목에서 두들겨 맞아 큰길가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수리에서 전동으로 넘어가는 운교(구름다리)로 일본인 거주지로 들어가 조선인을 괴롭히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본인 상점이나 가옥에 돌을 던지거나 린치를 하고 다시 피신하는 등의 행위로 강한 배일정신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제말기에는 강제징용과 강제징병을 피하기 위해 건달패, 정신병자, 걸인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신화수리, 화수리 아동이나 청년들에게 비밀리 무술을 가르치며 강한 민족의식과 배일정신을 갖도록 하였다. 그래서 1945년 8월 20일 애관극장에서 200명의 청년이 모여 결성한 ‘인천보안대’를 우익 측에서 건달패거리였다고 폄하하는 것도 바로 이런 좌익성향의 불량청년들이 대거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신화수리 권투선수 최관오, 화수리 건달 정인옥, 악어새로 유명한 박유필 등이 바로 이들이다.

 

▲ 1935년 권충일 사진2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권충일은 1950년 6월 30일 집에서 인천경찰에게 부역자 혐의로 체포되어 월미도 제방에서 경찰과 해전대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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