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최관오는 해방직후 인천을 대표하는 미들급 권투선수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 레슬링 라이트급 국가대표로 출전한 김석영(1948년 런던올림픽 레슬링 라이트급 출전)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최관오의 권투선수 생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동아일보 1946년 9월 14일자에 전조선권투총연맹 주최 제 2회 전조선 권투선수권대회에서 김진용과의 10회전 경기에서 무승부로 2회전 연장전을 했다는 기사 뿐이다. 그런데 왜 최관오는 유명한 권투선수로 알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 동아일보 1946. 9.14.

최관오와 대결하여 무승부를 기록한 김진용은 공포의 펀치 소유자로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진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1939년 제12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서 미들급 우승하였고(동아일보 1939.9.10.), 1941년 일본 오카모도 후지 초청으로 이상묵, 황을수가 인솔하는 미들급 조선대표로 출전하고, 1942년 10월 동경에서 개최된 전 조선- 전 일본 대항전에 라이트급 대표로 출전한 베터랑 선수였다.

최관오가 미들급 최고 선수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전까지 무승부 경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권투선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명경기였고, 권투선수로서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최관오가 권투선수가 되는 계기는 인천권투구락부 사범 신태영이 그의 탁월한 재능과 실력을 간파하고 권투를 배우기를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화수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신화수리 소년회에서 야구, 축구 등을 배울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단결의식과 강한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을 한 바 있었다. 또한 권충일로부터 전통 택견, 유도 등을 사사받으면서 격투기 운동이 반일의식을 합법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유용성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되면서 이 운동을 통해 사회 혁명을 통한 진정한 민족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였다.

당시 권투는 레슬링, 유도와 함께 한정 공간에서 투사가 되어 상대방을 때리거나 쓰러뜨림으로써 자신만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쾌감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울분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데 아주 적합한 운동경기였기 때문에 인천의 열혈 민족청년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1937년 말부터 조선총독부는 권투를 적성 스포츠로 정해 모든 활동을 중단시켰지만 이에 크게 반발한 청년들이 직접 권투를 배우고자 인천권투구락부로 몰려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청년으로 성장한 최관오를 지켜본 인천권투구락부 신태영은 권투에 대한 뛰어난 자질을 보고 집중 지도하여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친 미들급 선수권자 김진용과의 대결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벌일 정도로 대선수로 성장하였다.

▲ 1938년 전조선 권투선수권대회 개막식 출처: 대한체육회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 제국주의는 천왕을 위해 성전(聖戰)에 참여하자고 강제 징병과 강제징용을 하였다. 화수리 열혈 민족청년들은 천왕을 위한 성전에 나가 죽는 것은 개죽음이라고 생각하고는 이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장 건달, 가출 행려자, 팔푼이 등으로 위장 변신하였다. 이들을 이끈 사람이 바로 최관오였다.

이들은 조선인에게는 시장 건달, 팔푼이, 행려자 행세를 했지만 일본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인에게 못되게 굴거나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을 기습하거나 만나게 되면 애국투사로 변신해 가차없이 린치를 가했다.

이들은 화수리 일대 소년들에게 사탕을 주면서 인적이 드문 산동네로 인도해 전통 무술 택견을 가르치면서 배일사상을 심어주었다. 이들로부터 무술을 3-4년간 지속적인 무술지도를 받은 소년들은 조선기계제작소 일본인 사택 습격해서 돌을 던지고, 학교 가는 길에 화평동 구름다리를 지나 변전소따라 가는 축대 길을 따라 숨어 있다가 욱정 심상보통학교(현 신흥초등학교), 제 2 심상보통학교(현 축현초등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을 기습하여 폭행을 가하고 재빨리 화수리로 도망 나오는 행동을 하였다. 이들은 소년에게 무술을 가르치면서 “무술은 왜놈에게만 쓰고 어떤 경우에도 조선사람에게는 써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해방 직후 최관오는 이임옥이 대장으로 지휘하는 ‘치안보안대’ 결성에 화수동 건달 악어 정인옥과 박유필 등과 함께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인천시내 치안은 완벽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으로 행해졌던 폭력이나 약탈 행위는 거의 없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인천부의 미공군 폭격을 대비한 소개(疏開) 조치에 의해 폐쇄되었던 송현공설시장(현 중앙시장)도 해방이 되면서 다시 열렸다. 그리고 악어 정인옥, 박유필, 한동진 등 화수동 건달패들이 상인들의 상권이 보호 관리하였다.

해방 이전 일본인들이 시장에 와서 조선인 상인의 물건을 약탈하거나 횡포를 부리는 행위를 하면 주먹으로 손을 봐주면서 상인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고, 절대 지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화수동 건달패의 보호 아래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최관오는 건달패의 안정적인 생활 보장과 중국에서 입국하는 전재민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방안으로 인천항 미군부대 군수품 하역 노동자들에게 생활필수품들을 빼오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빼온 생활필수품을 전재민에게 분배하여 팔도록 하였다. 이게 오늘 동인천 양키시장의 시작이다. 미군사령부는 미군 군수품이 부두 하역노동자들이 몰래 들고 나와 시중에 유통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강력한 경고와 함께 검문검색을 강화하여 시중으로 흘러 나가지 않도록 강력 통제를 하였다. 이러다 보니 부두 하역노동자들은 미군부대를 나올 때 생활필수품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편법을 사용하다 보니 인천 시민들과의 갈등도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관오는 약자인 시민 편에서 판단하고 절대 손해를 주는 행위는 하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풍국제분공장을 교사로 사용할 때의 일이다. 군정시대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지만 미군 물자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원조 물자라야 신발, 의복 등 지금 생각하면 쳐다보지 않을 하찮은 물건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꽤 귀한 물건이었다.

원조물자의 교섭은 언제나 당시 영어교사였던 김영흥선생(현 L.A.주립대 교수)이 담당하였다. 영어회화 실력이 탁월한 솜씨 덕택에 2트럭분의 원조물자를 받아내게 되었는데 원조물자는 주로 생활용품이었다.

물자를 실어오기 위해 미군부대에 갔을 때 일이다. 부대가 있던 곳은 현재 대한석유공사가 있는 곳으로 당시는 이 곳을 ‘하다치(日立)’라 불렀다. 물자를 인수받아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난데없이 깡패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것이이었다. 

물자를 실을 때 자기들이 몰래 팔아먹을 귀중한 물건 두 상자를 트럭 속에 감추어 두었으니 이를 반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천에서는 손꼽은 깡패들로 미군수 물자를 몰래 빼내기 위하여 일부러 미군부대에 위장취업하고 있던 사람들로 그 두목은 바로 당대의 유명한 거구 최관오였다.(최관오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홍성유가 쓴 인생극장에서도 깡패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행패였으니 학교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풍국제분 주위에는 피난민들이 집단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학교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일의 발단은 미군부대에서 본교의 원조물자를 적재하는 과정에서 몰래 챙겨서 감추어 둔 자기들의 물건을 찾기 위해 그들 중 한 명이 본교 교직원으로 가장하여 승차하는 것을 김영흥선생이 제지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다행히도 두목 최관오와는 지면이 있어 그를 붙들고 설득을 시키니 이해를 해 주어 일은 무사히 해결되었다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깡패들의 이러한 행동이 공공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도 교사의 설득을 받아들여 선뜻 돌아서는 미덕을 보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기만 한 일이었다(인천여상 40년사, 인천여상동창회.1988. 101~102)

그 시대의 건달은 오늘날 건달과는 완전히 달랐다. 화수동 건달패들은 약자인 상인편에서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인천 건달패는 아니지만 부산 칠성파 두목 조인환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시대 잘 나가는 싸움꾼(건달)은 국가에 애국하는 정신으로 오로지 약자의 편에 서서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는 건 정말 감동 그 자체였어. 그러나 요즘 세대 건달들은 칼과 무기를 들고 이권 다툼하고 패거리 격돌하는데 얼른 보아서는 살쾡이가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행위로 국민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의 패륜아 단체로 멍들고 있다”(경남도민신문 2014.6.9. “그 시대 건달은 오로지 국가와 약자의 편에 섰다.”)

해방 직후 좌우익의 갈등으로 인해 인천체육계도 양분되었다. 인천 무도관 관장 유창호는 우익진영에서 레슬링 국가대표 김석영, 권투선수 최관오 등은 좌익진영에서 서로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유창호는 율목동 무도관을 배다리로 이전하면서 상덕관으로 간판을 바꿨다. 유창호는 우익 노동운동을 하여 부두 자유노조 위원장을 맡아 전평조직을 와해시키려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수제자 김수복에게 상덕관 경영을 맡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김수복을 상덕관 제자 중 핵심으로 세워 놓고 배다리 시장 근처와 시장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월남민을 포섭하여 좌익진영의 세력이 배다리 시장 근처까지 진출하지 못하는 강력한 견제를 하였다.

인천 체육계는 두 진영으로 양분되었다. 우익 진영으로는 인천무도관 관장 유창호, 그의 수제자 김수복 등이 중심이 되었고, 좌익 진영은 레슬링 김석영, 인천무도관 사범 이임옥, 권투 최관오 등이 중심이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좌익진영의 세력이 강하여 우익진영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우익 정치세력의 요청에 의해 평안청년회가 인천으로 영입되어 오면서 우익들은 서서히 기를 펼쳤다.

최관오는 사상적 스승인 권충일을 따라서 1946년 5월 5일 민주청년동맹 인천지부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또한 민족혁명당 인천시당에도 가입하였다. 남외과 원장 남기목은 김석영, 정인옥, 한동진 등의 청년을 포섭하여 지하조직을 짜도록 하였다.(김영일, 격동기 인천, 1986. p.514, p.506)

최관오를 중심으로 하는 화수동 건달패가 속해 있는 인천권투구락부, 김석영을 중심으로 하는 인천레슬링 구락부는 좌익청년운동 진영의 메카 역할을 하였고 난공불락이었다. 그래서 평안청년회도 1946년 10월 5일 30명을 동원하여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민주청년동맹 인천지부와 인민당 인천시당 사무실을 급습하는 동시에 인천권투구락부를 급습하여 간판을 떼버리고 내부를 부수는 행동을 감행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김영일, 격동기 인천, 1986. p.562)

최관오는 한국전쟁이 벌어진 후, 1950년 6월 29일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에서 1,000여명이 모인 군중집회에서 대책위원회 구성하는 앞장섰다. 수원으로 피난 간 경기도 경찰국은 한강 인도교가 끊기면서 인민군 남하가 주춤거렸다. 이때 다시 인천으로 진입하여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하는 최관오, 정인옥, 악어 박유필, 김표성 등과 함께 연행되어 군수사기관에 인수하였다. 최관오는 포승줄에 묶여 소월미도에서 총살당하였다.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진실화해조사위원회, 2009. 51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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