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 성장과정

1897년 수원군 송산면 고포2리에서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송산면 마산2리 176번지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박환: 수원지방의 3.1운동, p.169.)

남양감리교회 담임목회자로 시무했던 이창회가 동대문교회 전도사직을 그만두고 음죽군 동면으로 이사와 농사지으면서 서당을 운영할 때 4년간 사숙한 바 있다.(예종구 이창회-이대정 독립자금 모금 사건 참고인 조사심문서. 1924.10.26.) 이후 그는 농사짓는 일보다 한학에 더 관심으로 갖고 한학자와 교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송산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인물 중에는 정규교육을 받은 홍준옥, 문창익을 제외하고는 홍면옥, 홍효석, 차경천, 예종구 등은 서당에서 한학을 사숙한 인물들로 서로 간 교유를 통해 관계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당은 항일의식을 갖도록 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특히 대한제국 관리를 지낸 이정근이 수원군 7개면에서 서당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송재준: 화성군 송산면의 3.1운동,p.46.)

예종구는 이창회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사사받았는데, 이창회는 1872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에서 태어나 홍승하목사의 전도로 개종하였다. 1906년 남양교회 권사로 핵심 교인으로 활동하였고, 기호학회 남양지회를 조직하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었다.(이은선: 이창회의 애국계몽활동과 교회 활동)

 

2. 송산면 3.1독립만세운동 참여

예종구는 1919년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3월 26일 홍교선에게서 송산면 사강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동의하고 토지신고를 하려고 마을 사람들이 모인 사강리 이장 집으로 갔다. 홍면옥, 왕광연, 홍명선, 차경현, 최춘보, 안순원 등이 모여 논의하였다.

▲ 1919년 3월 28일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사강시장 ⓒ 인천뉴스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 장날이라 새벽 일찍부터 장날 주변 주민들이 모여 들었다. 200-300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출장 온 수원경찰서 소속 노구찌 순사 일행은 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만세 시위를 더 격력하게 전개하였고 점차 참여 인원도 많아졌다.

노구찌 순사는 만세시위가 거세지자 주동자 홍면옥, 예종구 등 3명을 체포하여 송산면 주재소에 구금하였다. 홍면옥은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으면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순사들과 격론을 벌였다. 일본 순사에게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주재소 밖으로 나가고자 하자, 홍면옥의 등뒤를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이에 홍면옥은 총을 맞고 쓰러졌고 총소리를 들은 시위대는 송산면 주재소로 모여 들었다.

홍면옥 동생 홍준옥은 자신의 형이 일본 순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판단하여 “형이 총에 맞았는데 어찌하여 보고만 있는가”하며 군중 앞에서 “일본 순사가 쏜 총에 맞았다”고 하였다. 다수 시위대가 이 말을 듣고 흥분하여 “일본 순사를 쳐 죽여라”고 하며 송산면 주재소에서 남양방면으로 도망치는 노꾸지 순사를 추적하여 마을 동쪽 끝 길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순사에게 돌을 던져 쓰러지게 하고 그에게 달려가 돌과 몽둥이로 머리, 얼굴 등을 구타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일본 순사 살해 주동자로 지목된 예종구는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 일본순사 노구치가 도망치다가 처단당한 곳 ⓒ 인천뉴스

예종구는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해 피신하였다. 송산면 지화 1리 정수일의 집 다락방에서 피신생활을 하였다. 예종구를 비롯한 살해자로 지목되어 피신한 시위참가자들을 체포하고자 혈안이 된 일본 경찰은 송산면 일대 집집마다 수색작업을 하였다. 정수일 집도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정수일 모친의 기지로 용케 일본경찰을 따돌릴 수 있었다.

▲ 경성복심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송산리 독립만세운동 주동자 1920.6.16. 동아일보 ⓒ 인천뉴스

예종구는 마산리 안성렬의 도움을 받아 마산포 앞 풍도로 피신하였다. 일시적 피신인 까닭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다시 대부도 처가로 피신하였다. 대부도에서 어도와 형도를 거쳐 가끔 마산리에 왔다가 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까닭에 간조때 바닷물이 허리춤까지 오기 때문에 쉽게 마산리 집에 들렸다가 다시 대부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3. 예종구의 인천에서의 피신생활과 체포

1920년 1월 경성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미북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교회 담임목사 이창회를 목사직을 삭탈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 참여한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이후 조선독립이 실현되지 않고 조선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추세로 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서 사회주의에 경도되면서 이로 인해 목사직에서 제적된 것으로 보인다.

이창회목사는 장남 이무정이 인천부 외리에서 의생 김종하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일하고 있어 인천 유정으로 이사를 하였다. 인천으로 이사온 이창회는 서당 제자 예종구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대부도에서 피신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인천으로 들어와 피신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예종구도 대부도 처갓집보다는 인천으로 피신하는 것이 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여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또한 애국지사인 김진호목사가 내리교회 담임목회자로 시무하고 있었던 까닭에 대부도에서의 불안한 피신생활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예종구는 인천으로 피신처를 인천으로 옮기면서 예종호로 이름을 바꿔 내리교회 엡웟청년회 서기로 공개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한학자인 김진호목사는 예종호의 한학 실력을 크게 주목하고 내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영화남자학교 한문교사로 재직하게 하였다.

이미 영화남학교에는 송산면 활초리 출신이자 홍난파의 숙부인 홍호가 교사로 재작하고 있었다. 그는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수원 삼일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3.1독립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징역형을 산 바 있는 애국지사였다. 후에 김진호목사의 큰 사위가 된 인물이다. 홍호는 예종구의 영화학교 교사와 내리엡웟청년회 활동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인천을 통해 중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인천경찰서는 수배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요시찰인물 이창회의 집에 숨어 있는 예종구를 체포한 것으로 보인다.

송산면 마산리 집도 일본 경찰의 소각으로 살림살이 몇 가지만 가지고 나와 새로 집을 짓고 농사짓고 사는 예종구의 아내는 남편 예종구가 인천경찰서에서 수원경찰서로 이첩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중 심한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급히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논 3,000평을 매각하여 이 돈을 수원경찰서에 기부하고는 남편 예종구를 석방시켰다.

하지만 송산면 3.1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 중인 인물도 있고, 심한 고문으로 옥사한 인물도 있는 상황에서 일본 경찰에 돈 3,000원을 주고 석방된 예종구를 바라보는 눈들은 그리 곱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