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수원경찰서에 논 3000평 판돈을 보석금으로 내고 석방된 예종구는 곧장 인천으로 왔다. 인천 내리교회 의법청년회에서 그를 기다리는 청년이 있었다. 배재고보 출신이면서 수원 삼일학교 교사로 재직 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역시 구속된 바 있는 홍호(화성시 남양읍 활초리 출신, 홍난파의 숙부, 김진호목사 큰 사위)가 영화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배재고보 출신으로 김진호목사의 차남 김택영이었다. 그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배재고보 재학 중, 부친 김진호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각국 대사관에 배포하고 거리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행인들에게 나눠준 혐의로 보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가 면소조치로 석방된 독립지사였다.

 

▲ 예종구 사진 출처: 수원대학교 박환교수 ⓒ 인천뉴스

그리고 남양 보흥학교 스승 이창회가 유동에 집을 마련하고 금곡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이창회는 인천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광주읍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던 목회자였다. 그래서 내리교회 김진호 목사와는 친분이 있었다.

예종호는 이창회의 추천으로 영화남자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한학자인 내리교회 김진호목사의 까다로운 면접 전형을 통과할 만큼 한문 실력이 매우 출중하였다. 더군다나 화성 송산면 3.1독립만세 시위 주도하였고, 일본순사까지 살해한 죄로 수원경찰서에서 잡혔다가 석방된 독립지사였기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실제 민족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교사로 아주 적합하였다.

▲ 애산 김진호목사 출처: 애산김진호목사기념사업회 ⓒ 인천뉴스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진호는 배재고보 교목으로 재직한 경험을 살려 청년 중심의 민족목회를 하였다. 예종호는 학교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가 주로 활동을 많이 한 곳은 내리의법청년회였다. 당시 임원은 회장 이범진(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 내리교회 전도사), 부회장으로 하상훈(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음악부장 홍호(영화학교 교사, 김진호 목사의 큰 사위)이었으며, 예종호는 서기로 선출되었다.(동아일보 1921. 4.15.)

또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내리의법청년회는 각종 초청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 음악회, 운동경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영화학교도 신앙을 토대로 하는 민족교육의 실현되는 곳이 되었다. 예종구는 이런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예종호는 내리의법청년회 주최 각종 토론회의 주토론자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가 처음 토론회에 나간 것은 1921년 4월 16일 내리의법청년회 월례토론회였다. ‘조선의 급무는 농업이냐 상업이냐’는 주제로 동아일보 인천주재 기자 박충희와 함께 상업의 입장에서 농업의 입장인 홍호, 박세평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때 예종호는 탁월한 논리와 달변으로 상대 토론자와 청중의 압도하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동아일보 1921.4. 15.)

이후 예종구는 내리의법청년회 토론회의 단골 토론자가 되었다.(1921년 6월 25일 토론회 ‘인생의 요구는 물질이냐 정신이냐’, 1921년 11월 5일 토론회 ‘인생의 최대 욕망은 안락이냐 사업이냐’, 1922년 2월 4일 토론회 ‘인류향상에는 과학이냐 종교이냐’, 1922년 2월 14일 토론회 ‘질병을 구제함에는 위생이냐 의약이냐’, 1923년 인천금주단연회 주최 토론회 ‘우리가 생활함에는 토산장려냐 소비절약이냐’ 등)

그리고 1921년 12월 내리엡웟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서기로 선출되는 등 영화남자학교 교사와 내리엡웟청년회에서 다양한 활동과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여 신뢰를 받는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2년 김진호목사는 배재고보 교장 H.D. 아펜젤러의 간곡한 요청으로 배재고보 교목으로 파송되면서 3.1 독립선언 대표 신홍식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김진호목사의 청년중심 목회에서 신홍식목사의 통합목회로 전환되면서 일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 동오 신홍식 목사 출처: 독립기념관 ⓒ 인천뉴스

1922년 신홍식목사가 부임한 후,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를 중심으로 하는 엡웟청년회 회원들이 먼저 교회를 이탈하였다. 전도장로 이범진, 하상훈, 서병훈, 박충희 등 1918년부터 엡웟청년회를 이끌어왔던 주요 인물들이 교회를 떠나 예술문화 청년단체 이우구락부를 결성하고, 또 한용청년단, 제물포 청년회 등 다양한 청년단체 활동을 하였다.

1923년이 되면서 미국 경제가 침체국면에 들어서면서 미국 교회로부터 선교지원비가 급격하게 감소되었다. 정규학교로 인정받지 않은 까닭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학력인정을 받지 못해 상급학교 진학에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개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는 재학생들이 공립학교로 전학가거나 재입학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 운영의 재정적 어려움이 매우 컸다.

개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도 조선총독부에 공립학교와 동등한 학령인정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정한 교육과정을 전면 수용하고 종교교육을 금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개신교 사립학교는 종교교육만 허용한다면 나머지 요구조건을 다 수용하는 것으로 타협하여 정규학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교육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로 학력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공립학교에 준하는 교원면허 요구하였다. 교사면허 취득 가능성 여부와 일본어 구사능력이 부족한 조선인 교사들은 결국 학교에서 퇴출시켰다. 남양보흥학교와 서당 교육만 받은 예종구도 이에 적용되어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23년 11월 예종호가 서기로 활동하는 내리엡웟청년회도 통합문제로 진통을 겪게 되었다. 내리교회 담임목사 신홍식목사의 통합목회 방침에 따라 내린 조치였다. 이런 일방적 통합조치에 내리엡웟청년회 임원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임원들의 반발이 심각하다는 것을 간파한 신홍식목사는 내리엡웟청년회측에 회무발전을 위한 간친회를 요청하였으나 통합목회 계획 방침에 따라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역설하는 자리 밖에 되지 않았다.(동아일보 1923. 11.21.)

이에 예종구를 위시한 내리엡웟청년회 임원들은 통합 문제에 관한 자체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근거로 장래방침을 논의하였다. (동아일보 1923.12.29.) 신홍식목사는 내리엡웟청년회의 요구를 관철하지 않고 남녀 엡웟청년회를 통합하는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통합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임원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회장은 홍호 부회장 김옥빈이 선출되었다. 이어 내리엡웟청년회 회칙을 개정하여 회원 자격을 기존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허용하는 것을 10대 후반부터 20-30대 후반을 제한하였다.(동아일보 1924.2.29.)

예종호는 영화남자학교 교사직에서 물러나고, 남녀 내리엡웟청년회의 통합, 회원 자격제한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화성군 송산면 마산2리로 낙향하여 마산강습소를 개설하여 한글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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