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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 인천 배재학우회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 기차 통학생

▲ 배재고보 전교생 출처: 선교사 테일러 아카이브

1915년 무렵부터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기차통학이라는 새로운 통학방식이 생겼다. 경인선 기차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축현역(현 동인천역)에서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18회 정기운행을 하고 소요시간이 55분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이전에는 인천에서 경성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경우에는 교통편이 불편하거나 교통비 부담이 커서 학교 기숙사나 하숙생활을 하였다.(신태범, 인천 한 세기, 홍성사. 1983. p.150~151)

당시 인천에서 경성으로 중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조선인 아동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영화 남녀소학교, 박문학교,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서 200명의 졸업생을, 일본인 아동만 다니는 아사이 심상보통학교(현 신흥초교), 제 2 심상보통학교(현 축현초교)에서 200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인천에는 중등학교는 조선인만 입학하는 인천남상업학교와 인천북상업학교가 있었고, 일본인 여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인천여자고등보통학교만 있었다. 전체 입학생수는 150명에 불과하였다.(신태범, p.150~151)

초등교육기관은 매우 빠르게 늘어났지만 이에 상응하는 중등교육기관의 팽창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입시위주의 교육과 입시난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특히 인천지역에서 중등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백순근, 일제강점기의 교육평가, 교육과학사. 2003. p. 66)

인천은 인문계 중등학교가 전혀 없는 관계로 부득이 경성 공사립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1936년 인천중학교가 개교하면서 비로소 인문계 중등학교가 생겼다. 인문계 중등학교보다는 실업계 중등교육을 집중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게 하면서 식민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일본제국주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인천 거주 조선인의 향학열은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대로 되지 못했다. 인천 기차통학생은 조선인 통학생 200명, 일본인 통학생 100명 정도였다.

특히 배재고보 통학생들은 경성중학교 통학생과 같이 각반을 찼던 관계로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신태범, p.150~151) 배재고보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민족학교로 자리매김을 한 있었다. 그래서 배재고보 학생들은 강한 애교심으로 하나로 결속하였다. 학교에서 유도 등 각종 운동을 배운 까닭에 일본인 통학생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예방하고 기차 통학하면서 자체 규율을 지키도록 선도하는 활동을 펼쳐 타학교 통학생으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2. 인배회 조직과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진호의 역할

▲ 1921년 6월 8일 동아일보

1921년 6월 5일 인천 거주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생 30명이 친교와 지식교환을 목적으로 인천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우회(통칭 인배회)를 조직하였다.(동아일보 1921.6.8.) 정기 모임은 매월 첫 주 일요일 오후에 갖도록 정하였다. 초대 회장 윤대석(배재고보 9회, 1925년 졸업), 문학부장 김택영(배재고보 6회, 1922년 졸업), 운동부장 이보운(배재고보 9회, 1925년 졸업)을 선출하였다.

실제 인배회를 이끈 인물은 김택영이었다. 그는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진호의 장남으로 3.1독립만세운동 때 배재고보 재학생들의 독립선언문 배포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부친 김진호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다가 특별사면으로 풀려 나온 독립지사였다. 그는 인배회 조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와 집회 방해, 새벽부터 밤늦게 귀가해야 하는 힘든 학교생활로 인배회 활동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인배회를 지원하고 지도했던 당시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진호는 재학생 중심의 조직을 인천 출신 졸업생까지 포함하는 조직 확대를 모색하도록 지도하였다. 김진호목사는 배재고보 교사 출신으로 배재고보 재학생들의 3.1독립만세운동을 지도한 주동한 죄로 감옥 생활을 한 독립지사였다. 그는 배재고보 지역 동창회 성격을 갖는 조직으로 발전시켜 본격적인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추구하도록 지도하였다.(이덕주, 선교사와 한국교회 인물연구, 2018. P.358)

당시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당 및 배재고보 출신들이 있었다. 김진호목사는 배재고보 출신 내리교회 교인 장기진( 본과 4회, 1912년 졸업), 황도문(본과 5회, 1913년 졸업), 권인일(본과 5회, 1913년 졸업), 송의근(고보 3회 1919년 졸업), 홍호(배재고보 4회, 1920년 졸업) 등에게 배재출신만의 강한 동문의식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재학생 중심의 인배회에서 졸업생들도 적극 결합하는 인천 배재동창회 성격의 청년단체로 거듭나게 하였다.

▲ 김진호목사 출처: 애산 김진호목사 홈페이지

1921년 10월 24일 배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까지 포함하는 인배회로 새로 출발하였다. 새로 선출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홍호(고보 3회, 1920년 졸업), 이사 이상룡(고보 8회, 1924년 졸업), 서기 송의근(고보 3회, 1919년 졸업), 진태원(본과 13회, 1922년 졸업), 엄영섭(고보 10회, 1926년 졸업), 문예부장 한상봉(고보 3회, 1919년 졸업), 운동부장 김택영(고보 6회, 1922년), 통학감 윤대석(고보 9회, 1925년 졸업), 김택영(동아일보 1921.10.29.)

▲ 1921년 10월 29일 동아일보

직 확대를 한 인배회 운영은 실제 졸업생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형식상으로는 동문간의 친교와 지식정보 교환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추구하였다.(이덕주, 동게서)

 

손경옥 기자  press@inche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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