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조선기계제작소 5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조선기계제작소는 ‘유3001호’에 이어 마루유 2호 ‘유3002호’, 마루유 3호 ‘유3003호’를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 진수하여 일본 육군에 납품하였다. 그런데 조선기계제작소가 잠수함 건조하는데 자재와 부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당초 합의에는 자재가 필요하면 인천 조병창에 필요한 분량을 신청하고 인천 조병창은 즉시 오사카 조병창에 전달하여 오사카 조병창이 즉 도쿄와 사가의 조병창에 주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사카 조병창은 이를 수합해서 인천으로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잠수함 건조에 차질이 생겨 몇 차례 부평 조병창을 방문하여 오사카 조병창에 신속히 자재, 부품 등을 보급해 줄 것을 문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부평 조병창 담당관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만 반복할 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필요한 자재가 2개월, 3개월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 1932년 오사카 조병창 전경 출처: 민족문제연구소

또한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 육군으로부터 마루유 건조를 100척 가까이 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신규 채용을 1,300명으로 하는 바람에 경영상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렇게 잠수함 건조가 지연되고 있는 사이 항해 훈련 중인 ‘유3002호’가 악천후를 만나 침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인천 조병창도 조선기계작소의 잠수함 건조 지연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1945년 3월 조선기계제작소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회의에는 인천 조병창장 와케 타다후미(和氣忠文)소장도 참석하였다. 수송 담당 장교는 “오사카 조병창에서 필요 자재, 부품을 오래 전 발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기계제작소측이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해명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기계제작소 자재 담당자는 “이런 일로해서 곤란하다. 그렇다면 부산항 창고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따졌다. 동석한 조선인 평사원들은 무릎 꿇고 담배를 주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자재를 받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와케(和氣)소장은 조선인 평사원들의 호소를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조선인 평사원들은 조선기계제작소 중역에게서 “훌륭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잘 했다”고 칭찬을 들었다.

인천 조병창은 조선기계제작소와의 회의 후, 오사카 조병창에서 발송한 화물을 추적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자재와 엔진 등 각종 부품들이 부산항 부두에 장기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별 운송 취급” 꼬리표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긴급 건설 관련 화물을 우선적으로 수송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필요 자재와 부품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조선기계제작소에서 건조한 마루유 잠수함은 3척에 불과하였다. 또 종전 시 드라이 도크에는 건조 중인 6척의 마루유 잠수함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4척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드라이 도크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기록영화에도 명확히 등장한다.

 

▲ 해방 후 조선기계제작소 도크에 방치된 마루유 잠수정 출처: 화도진도서관

일본 육군 본부는 400척의 마루유를 건조할 계획이었으나 완성된 것은 겨우 38척이었다. 필리핀에서 일부 잠수함을 특공 선박으로 사용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원래 계획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선기계제작소에는 근로보급대로 인천중학교 10기생들이 동원되어 잠수함 스크루를 만들었지만 100개중 2~3개 정도만 합격할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著 ‘仁川の 七十年’ (2018)

 

필자 소개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1938 년 경기도 출생. 마이니치 신문 경제부 기자, 편집 위원, 下野新聞社 이사, 作新学院大学 강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특명 전근」(문예 춘추사) 「내린 일장기」(신쵸 오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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