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조선기계제작소 6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1945년 8월 15일 일왕 항복 선언 방송 후 인천이 어떻게 되었는 지는 졸저 ‘내려진 일장기 를 읽어주기 바란다. 그러나 군수공장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육군 한 소대가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일본기업처럼 군중으로부터 습격을 당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한다. 단지 한국인 직원에 의해서 조선기계제작소 재건위원회가 출범하여 회사 자산을 접수하였다. 이 홈페이지 관리인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의 조부인 노무과장 모리모토 히로시씨가 재건위원회에 소환되어 2, 3일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마 재건위원회와의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월미산에서 내려다 본 조선기계제작소 전경] 출처: 김식만 블러그의 ‘인천의 어제와 오늘’

건조 중이던 잠수함 중 거의 완성 단계인 2척은 미군에 의해 인천 앞바다에서 폭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기계제작소는 한국중공업에서 대우재벌중공업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두산그룹에서 인계하여 경영하고 있다. 조선기계제작소의 진정한 모기업에 대해서 고찰 해보자.

조선기계제작소 창업 시 사장은 쇼와전공 창업자 모리 노부테루(森矗昶)의 친동생 모리 테루히토(森輝)였던 것은 앞서 말하였다. 모회사 요코야마 공업소 사장 요코야마 마사오(橫山公雄)가 전무로 되어 있는 이상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임원진을 살펴보면 부국징병보험(전후 부국생명보험으로 개칭)의 요시다 요시떼루가 2대 사장으로, 3대 사장으로 고바야시, 4대 사장이 사타케지로가 되었다. 네즈 재벌의 중진 후쿠시마 시게루 토미(福島茂富)가 이사, 스다마사(須田政道)가 감사를 맡았다. 또한 조선기계제작소 도쿄 영업소가 치요다구(千代田区) 우치사와이쵸(內幸町) 2-2에 있었다. 현재 일본 언론의 중심이 되는 일본 프레스센터 빌딩이 들어서 일본 신문협회, 일본 기자클럽이 있는 곳이다. 수많은 신문사, 통신사가 지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부국생명 본사가 있었다. 조선기계제작소 도쿄영업소와 부국징병보험 본사는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 요코하마 공업소는 전후 가와사키 중공업에 흡수 합병되었기 때문에 자료가 거의 없다.

요코야마 마사오(橫山公雄)는 오쿠라 그룹을 거쳐 노동쟁의로 유명한 오지마 제강소에 재직하였다. 그의 고향은 야마나시(山梨)로 네즈재벌 창업주 네즈 가이사로ねづ かいちろう(根津嘉一郞)도 고향이 야마나시(山梨)였던 관계로 친분이 두터웠다. 요코야마 마사오(橫山公雄)는 네즈 가이사로우(根津嘉一郞))에게 조선기계제작소 출자를 요청하였다. 네즈는 자신이 사장으로 있었던 부국징병보험 기금을 제공하여 설립한 회사인 것이 판명되었다. 네즈는 조선기계제작소 감사로 후쿠시마 시게루를 요코야마공업사 이사로 파견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기계제작소의 진정한 소유주는 부국징병보험을 중심으로 하는 네즈재벌이었으며, 거기에 쇼와전공이 협력하여 설립한 회사였다. 왜 부국징병보험은 표면에 나오지 않고 요코하마공업소를 모회사처럼 했을까?¹ 그러나 부국징병보험이 전면에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전후 일본경제에 커다란 행운을 가져오게 하였다. 미연합군은 종전 이전 군수공장 관여자를 전원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조선기계제작소 3대 사장을 지낸 고바야시는 공직 추방을 면하고 일본 개발은행의 초대 총재로 취임할 수 있었다.² 그는 일본 경제 재건을 위한 자금부족이 부족한 상황 가운데, 자금지원우선업종을 정하고 집중 지원하여 육성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바로 이것이 ‘경사 생산지원방식’(傾斜生産方式)으로 전후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에도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후지철도사장, 사쿠라다 타케시(桜田武) 닛신보 사장, 미즈노 시게오(水野成夫) 산케이 신문 사장과 함께 재계 사천왕으로 불려 일본고도성장에 공헌 했다. 조선기계제작소에서의 경험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천은 전후 일본 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이다. 조선기계제작소의 사장 경험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천은 전후 일본 경제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부국징병보험 회사는 1943년 6월에는 조선기계제작소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조선기계제작소가 군수회사로 지정되는 것은 1944년 10월 28일이었다. 고바야시는 전후 미연합군의 군수공장 관여자 공직 추방에서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著 ‘仁川の 七十年’ 2018.4.17.

 

필자 소개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1938 년 경기도 출생. 마이니치 신문 경제부 기자, 편집 위원, 下野新聞社 이사, 作新学院大学 강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특명 전근」(문예 춘추사) 「내린 일장기」(신쵸 오샤) 등.

1) 1943년 6월 네즈재벌과 부국징병보험은 조선기계제작소 경영에서 손을 뗐다. 회사 확장에 출자를 확대하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수익구조는 점차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육군은 잠수함 건조를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설비투자 및 고용인원 충원을 해야 하는 등 경영 악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한 네즈재벌과 부국징병보험은 출자액을 크게 축소하거나 전액 회수 조치를 내렸다. 요코야마공업소(橫山工業所)는 실제 소유주인 네즈재벌과 부국징병보험의 경영 이탈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출자금을 증액하고 지분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리고 출자구조도 다양화하였다. 삼야 안전재벌, 대판상선의 자본 투자를 이끌어 냈다.(2018. 5.19. 저자 吉原 勇와의 인터뷰. 인천 싸리재)

2) 大阪 朝日新聞 1944.12.8. 부국징병보험회사는 1943년 6월에는 조선기계제작소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으로 나온다. 조선기계제작소가 군수회사로 지정되는 것은 1944년 10월 28일이었다. 고바야시는 군수회사로 지정되기 이전에 사장을 역임하였던 관계로 전후 미연합군의 군수공장 관여로 인한 공직 추방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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