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의 남침을 직접 목격하거나 소식을 접한 황해도 옹진, 해주, 연안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난을 왔다. 당시 3.8선 접경지역의 교전이 잦은 편이어서 전면전으로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인천시청은 인천공회당에 임시 피난민수용소를 설치하고 응급 구호식량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피난민들이 김포를 거쳐 부평, 장수동으로도 줄을 잇자,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임을 감지하고 6월 28일 인천시장을 비롯한 공무원, 인천 경찰서가 수인선을 통해 수원으로 철수하였다.(이현주, ‘인천이 겪은 해방과 전쟁’, 이성진, ‘해방기 인천의 좌우투쟁과 그 종말’ 참조)

6월 28일 저녁에는 인천소년형무소 임시수용소(현 신광초등학교)에서 여순사건 및 4.3항쟁 관련 수감자들이 인민군들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탈옥을 하였다. 이들은 지금 광성고등학교가 있는 공원에 집결하여 조직 점검 및 인천 경찰 동태를 파악한 후, 인천시청으로 향하였다, 6월 29일 차량을 접수하고 인공기를 제작하여 차량에 걸고 인민해방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전쟁 직전에 인천경찰서 유치장으로 잡혀 온 좌익인사들이 탈출하였다. 전쟁 직후 인천 경찰의 총살을 피한 송공삼, 신두영 등 주요 좌익인사들이 탈출한 것이다.(한국전쟁 당시 미해병대 통역관 증언 2006년 9월16일 ) 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식하고 즉시 인천으로 떠나 신우철, 김요한, 이보운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그리고 최관오, 박유필, 정인옥 등이 거느리고 있던 화수동, 만석동 건달패도 이에 동조하여  만석동 일대 식량창고와 세관 창고, 동양방직 창고 등을 주민들에게 개방하여 식량 및 생활물품을 가져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천시청에 결집하였다. 6월 30일 이들은 인민군 환영 시민대회를 준비하고자 인천 인민군환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인천지역 좌익인사를 중심으로 우익인사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환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6월 28일 이승만대통령의 명령으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면서 인민군의 진격은 서울 점령으로 일시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틈새를 노려 인천 지역 우익인사들은 경기도 비상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우익청년단체, 노동단체, 학련 등을 소집하여 좌익세력의 준동을 막는 태세를 확립하고 인천사태를 수원으로 후퇴한 인천경찰에 알리고자 학련위원장 이계송 등을 파송하였다.

6월 29일 오후 4시경 경찰과 해전대가 인천으로 다시 들어와 인천우체국 쪽에서 좌익세력이 결집되어 있는 인천시청을 향해 진격하였다. 좌익세력은 인민군으로 착각하여 환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 백명의 완전무장한 경찰과 해전대는 박영희 경찰대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기관총, 소총으로 일제 사격을 하며 진격하였다.

인천시청에 집결한 좌익세력들은 전혀 대응하지 못한 채, 경찰과 해전대 갑작스런 총격에 속무책으로 죽음을 맞았다. 최관오, 김창식, 정인옥, 박유필, 김용규 등이 이에 해당한다.

6월 29일 새벽 우리는 인민군의 입성 환영 준비로 시 위원회(인천시청, 현 중구청)에서 일하고 있는데, 돌연 기관총 소리가 나서 뛰어 나가보니 인민군으로 가장한 놈들 약 60명이 시 위원회를 포위하고 난사하고 있었다. <중략> 남자들은 포승한 채로 배에 실어 바다에 내어가고 여자들은 모두 옷을 벗긴 후에 모래사장 위에 꿇어앉혀 가지고 역도 놈들은 칼로 쇠고기를 비이다시피 난자하는 한편, 그것도 부족한지 몇 놈은 톱을 가지고 다리를 자르고 있었다(조선인민보 1950.7.15. 인천이 겪은 해방과 전쟁에서 재인용)

경찰과 해전대는 인천시청 급습 후, 인천인민위원회 명부를 입수하여 이것을 근거로 인천시내 좌익분자 색출에 나섰다. 색출 작업은 대대적으로 실시가 되었는데, 대한청년단이 경찰을 대동하고 좌익분자 집을 일일이 수색하여 검거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경찰이 체포한 좌익분자들을 고문 취조를 한 후, 트럭에 태워 월미도로 보내면 해전대는 즉결 처형하였다.

경찰대가 입수한 명단 중에는 하상훈이 적군 환영회 부위원장으로 기명되어 있었다. 이 명단을 증거로 모든 기명자는 체포되었다. 내 권고를 듣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던 추강 하상훈이 좌익 공산당 아닌 적구로 오인되어 처형도리 것은 불문가지의 노릇이었다. 우리 동지들은 급거 회의를 열고 하상훈 구출의원으로 오창섭, 전두영, 이열헌 등 3인을 선출하고 박영희 경찰대장을 방문하고 백방으로 자의 아닌 타인에 의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드디어 구출하였으나, 심한 고문으로 그 모습은 너무 처참하였다.(인천시사 상권 542쪽. 1973.)

하상훈은 인천시장 지중세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수원으로 피난간 것에 분노하여 인천시청에 머물러 있다가 인민군환영대회 부위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주동자로 몰려 총살당할 처지에 있었으나 경기도 비상시국대책위원회에서 적극 나서서 구출한 것이다. 그러나 하상훈과 같이 인천인민위원회 운수부장으로 선출된 자유노조 위원장 유경원은 월미도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인천경찰과 대한청년단은 은신하고 있는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인사 색출 검거에 전력을 쏟았다. 인천인민위원회 고문을 지낸 권충일이 화수동 집에서 체포되어 월미도로 끌려가 처형되었고, 민전 인천지부장 박남칠도 경찰과 대한청년단이 보도연맹원을 색출 검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현동 자택 마루밑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김양수(인천시편찬위원, 이하 김): 6월 29일일거야. 맞아 내가 직접 본거니까. 박남칠씨 집이 우리집 바로 건너편에 있었어. 그래서 내가 직접 볼 수가 있었지. 그날 빨갱이를 잡으러 다니던 경찰이 인현동 집으로 와서 잡아 갔어.
이성진(이하 이): 박남칠씨 집이 정확하게 어디인가요?
김: 거기가 어디냐면 채미전 거리 초입, 조봉암선생 가게가 주택은행 그 자리 거기였어.
이: 성환상회 있는 자리요?
김: 그래 그 옆에가 박남칠씨 집이었지. 그 사람 교회를 잘 다녔지. 지금도 기억하는데 일요일되면 가게 문을 닫고 양복을 쫙 빼입고 옆구리에 성경을 들고 교회, 그게 내리교회지. 그렇게 걸어서 가는 모습을 자주 봤지. 내가 집 앞에서 직접 봤어. 그래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들어보니 박남칠씨가 보도연맹 가입했던 좌익분자들을 검거한다는 말을 듣고 집 마루 밑에 숨어 있었는가 봐. 경찰이 와서 물어보니까 숨은 걸 본 꼬마 조카아이가 겁에 질려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거야. 그래서 잡힌 거지. 그때 본 박남칠씨 모습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어. 경찰에서 잡혀가는 사람들을 거리로 데리고 다니면서 시가행진을 시켰는데 박남칠씨가 맨 앞에서 걸어갔지. 그 사람들 좌익활동 하던 사람들이었지. 그대로 끄려가 월미도에서 학살당했다는 얘기만 들었지. 참 점잖은 사람이었지(이성진, 한국전쟁 최초의 집단학살, 인천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 2006)

보도연맹원을 위시한 좌익분자 색출 검거에는 가족까지 체포해 학살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인천인민위원장 김용규는 6월 29일 인천시청에서 인민군 환영대회 준비중 급습한 경찰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그러나 이를 확인 못한 경찰과 대한청년단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집 수색을 하였다. 그가 집에 없자,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족 8명을 팔미도로 끌고 가 수장하였다.
놈들은 지난 29일 이르러서는 시내에서 체포한 애국적 인민들을 수많은 트럭에 만재하여 월미도에서 총살한 후, 물 속에 집어 넣었다. 이렇게 무참하게 살상된 인민은 남녀노소 천여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눈과 목, 젖까슴 등에 수 십발의 총탄을 맞았고, 전신에서 처절한 칼자욱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인천부두에는 피해자들 찾는 울부짖음과 원쑤를 갚고야 말겠다는 증오의 웨침으로 찼다.(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2006.)

이러한 경찰과 대한청년단 그리고 해전사의 잔혹한 집단학살은 당시 피난가지 못한 인천시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반항을 초래하였다. 7월 18일 미군보고서에서도 1950년 6월 29일 인천에서 한국정부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있은 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주민 400명이 처형됐고, 이로 인해 인민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고 보고되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기밀문서 27RG338)

해외에까지 알려져 영국 데일리 워커지 특파원 알란 워닝턴은 1950년 9월호에서 인천에서 6월 29일부터 7월 3일 사이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이 1,800명이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7월 17일 달드(Dald)로부터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6월 27일 인천으로부터 정부군은 탱크 진지와 방어진지를 구축한 후 후퇴하였다. 지금 북한군이 이 도시를 장악하였다. 시민들은 6월 29일 남한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인천지역 공산주의자 400명을 학살한 군대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Daily Worker, September 1950)

1950년 7월 8일 답동 신흥초등학교에서 열린 서울인민위원장 이승엽은 애국지사 집단학살 인천시민 규탄대회에 참석하였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인천의 애국인민들이 조선해방 전선에 직접 나서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운동장과 교실에는 인천시민들로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운동장에는 공장 소조별로 팻말을 들고 참여하였는데 조선기계제작소 400명, 조선철도공작창 300명 등 인민의용군 자원입대를 시작으로 일시에 3,000명이 자원입대를 하였다고 한다.(한국전쟁 당시 미해병대 통역관 증언 2006년 9월16일 )

▲ 한국전쟁 당시 인민의용군 모습(출처 전쟁기념관)

 영웅적 인민군의 진공으로 해방된 인천시민들은 7월 8일 희생자들의 비통한 얼굴들에는 한결같이 원쑤를 갚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력력히 보이였다. 특히 황선학, 황익선 두 형을 놈들의 만행에 의해서 잃은 황선도 소년은 원쑤를 갚기 위하여 의용군대에 지원하였다.(로동신문, 1950.7.16.)

인민의용군 지원자들이 상인천역에서 인천시민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 편으로 서울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등포역에 수송 기차가 도착하기 직전 미공군기의 공중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후 인민의용군 지원자들은 야간을 이용해 도보로 서울로 이동했으며 집결지는 서울 정동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고 한다.(곽현숙 인터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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