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 세브란스 의전 학생

나시극은 일본 큐슈 풍국중학교를 나와 1920년 세브란스의전을 마쳤다. 경성문흥사가 주최한 서울 전문학교 졸업생 초청 학술강연회에 세브란스의전 대표로 참석하여 주제 ‘조선인의 의학관념’을 발표하였다.(매일신보 1920.3.20.)

▲ 세브란스 의과전문학교 전경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제 10회 졸업생은 8명인데 3명은 세브란스에서, 1명은 대구 기독교병원에서 일하였고, 4명은 한국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였다고 한다.(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 995쪽) 나시극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후, 의사면허시험에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의과학교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를 주었지만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생들은 별도로 자격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인천으로 내려와 용리에 평화의원을 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이만열, 동게서 326쪽)

▲ 해부실습 1919년 졸업앨범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2. 인천에서의 개인병원 의술 활동

당시 인천은 1916년 성루카병원이 폐원한 후에는 부득이 일본인 의사만 진료를 보는 부립병원을 다녀야만 하였다. 그러나 실제 부립병원의 수혜자는 일본인 관료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환자는 입원도 힘들었고, 일본인 의사와 의사소통도 안 되고 민족 차별로 대부분 조선인들은 한의사나 한방을 겸업하는 약방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조선인들 중에서는 갑자기 다쳐서 수술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인천에도 조선인 의사가 진료하는 병원이 생겼으면 하는 요구가 많았다. 이런 요구를 알게 된 나시극은 1921년 인천부 용리에 평화의원을 개원하였다.(신태범, 인천 한세기 179쪽)

세브란스 의전은 교수, 의료진과 학생들은 전부 기독교인이었다. 세브란스의전은 의료를 통한 전도를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 의료사업은 한국교회와 한국인 의사진들이 수행한다고 생각하고 신앙과 의술의 탁월한 실력을 갖춘 기독교인 의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나시극은 인천에서 병원 개원을 하면서 내리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특히 세브란스의전 출신의사 중에는 직접 민족독립운동 현장에 나서거나 의술을 통해 독립우동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영향으로 나시극은 단순히 의사로서 의술만 행했던 것이 아니라 내리의법청년회, 한용청년단, 신정회 등을 통해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3. 기독교 청년운동기독교

나시극이 인천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처음 한 곳은 내리교회이다. 특히 내리의법청년회에서 적극 활동을 하였다. 당시 내리의법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중추였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 신보기자들이 대거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로 강연회, 연극공연, 봉사활동, 토론회, 운동경기 등을 통해 각종 계몽애국운동을 전개하여 회원 수만 311명이었다.
감리교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의 3.1독립만세운동 논의 과정에서 노선이탈로 인해 내리교회, 화도교회, 담방리교회, 부평읍교회 등에서 적극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3.1독립만세운동 이후 미국 선교사들의 친일노선과 교회의 정치적 참여 금지에 의한 교회 청년들이 대거 교회를 이탈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 등 각종 정치이념을 갖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분화되었다. 내리의법청년회 회원 수의 증감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173명, 1920년 46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1921년에는 311명으로 급증하였다.

1920년 내리교회 청년 교인들이 대거 교회를 이탈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된 감리사 오기선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전도사 김진호를 청빙하여 교회를 정상화하려고 하였다. 1921년 장년 중심의 목회에서 청년 중심의 목회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옴에 따라 내리의법청년회는 7배 이상 회원 수가 급증하였다.

특히 나시극이 세브란스의전을 다닐 때부터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나시극은 청년 담당 교육전도사였던 김진호에게서 신앙지도 받은 바가 있었다. 또 배재고보 출신 홍호가 영화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나시극과 함께 정동제일교회 청년부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

나시극은 1921년 11월 5일 내리의법청년회 사교부 주최 월례 토론회에 예종호와 함께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정기총회에서 자선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사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나시극은 1922년 2월 25일 내리의법청년회 주최 초청강연회 강사로 초빙되어 ‘생산물과 인생의 개념’ 주제를 발표하였다. 4월1일에는 전도부 주최 월례토론회 ‘사람을 복종케 함에는 덕이냐 력이냐’ 주제로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12월 16일 정기총회에서 자선부장을 재선출되었다.

1923년 이후부터 나시극은 내리의법청년회 임원이나 각종 토론회 등 각종 활동에서 빠졌다. 김진호목사가 배재학당 교목으로 떠나고 신홍식목사가 새로 부임하였으나 청년중심 목회가 장년중심 목회 전환하면서 이범진전도사(현재 장로)가 교회를 이탈하고, 사회주의 운동 여파로 조선청년동맹 가입 청년대회 참여 여부를 두고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교회 이탈이 가속되던 시기에 나시극도 내리의법청년회 활동을 그만 두었다.  .

4. 한용청년회 활동

나시극은 1921년 12월 5일 한용청년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원래 단체명은 한용단이었다. 경성기차통학생을 중심으로 결성한 단체로 초대 단장은 곽상훈이었다. 한용단은 다양한 운동경기를 통해 일본인과 합법적 공간에서 경쟁하고 승리함으로써 민족적 울분 해소와 더불어 단결을 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 간주하고 한용단을 조직한 것이다. 특히 일본인이 많은 인천에서의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직접 겪는 청년에게서는 그 울분과 분노를 공정하고 공평한 규칙 안에 경쟁을 해서 승리함으로써 갖는 민족적 뜨거움을 맛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1년 한용단은 한용청년회로 개명하였다. 이는 야구, 축구 등 운동경기 중심의 체육단체에서 명실상부한 다양한 정치 문화활동으로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용청년회로 개명한 것이다. 나시극은 조선일보 기자 최진하 등과 친분을 쌓으면서 한용단 회원으록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조직 개편을 하면서 회장, 부회장, 회계, 자선부, 음악부, 사교부, 체육부 등을 설치하였다.

나시극은 한용단 단장을 지낸 곽상훈, 박창한의 뒤를 이어 1921년 12월 5일 제 1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회장으로 있으면서 1922년 2회 정기총회에서 조직개편을 하였고, 이사로 선임되었다. 회원 자격을 18세~35세까지 제한을 두었고 체육부, 자선부, 문예부를 삭제하고 서무, 선전부, 사교부만 존치하는 개편을 하였다.
1923년 5월 인배회 주최 웅변대회에 한용청년회 대표로 정수일과 함께 출전하여 인천 시민을 상대로 그동안 말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울분을 마음껏 토로해 많은 갈채를 받았다.

5. 이우구락부 활동

이우구락부는 고전국악연구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국 내에 사무실을 두었다. 죽림칠현처럼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국악동호회가 생겼다.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 중심으로 인천지역 유력 지주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회원을 보면 동아일보 인천지국장 하상훈, 기자 서병훈, 내리교회 전도사 이범진, 영화학교 교사 출신 최선경, 내리교회 전도사 김태진, 의사 고주연, 동아일보 기자 박충희, 전두영, 송균 등이다.(김윤식, 이우구락부 경기일보)
이들은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국악동호회를 구성하고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모색하면서 각종 음악회, 토론회, 웅변대회 등에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1년 12월 내리의법청년회와 한용청년회와 공동으로 영국 여류 화가 키스여사 자작화 전시회를 여는 등 음악, 미술 등 각종 예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서 알려져 있어 인천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1.12.7.)
나시극은 내리의법청년회 임원을 하면서 교유한 하상훈, 이법진, 서병훈, 박충희 등과 함께 이우구락부에도 가입하여 전문 예술 활동도 참여하였다. 그는 1923년 5월 27일 이우구락부 제 7회 정기총회에서 운동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인천지역의 유지로서 재력을 바탕으로 인천 지역 각 청년단체의 예술문화활동을 적극 지원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6. 각종 청년단체 활동

나시극은 각종 사회 활동에도 전념하여 1922년 6월12일 인천 각 단체 대표와 유지개인들이 모여 공익사업을 조장하며 인천부 민선 위원을 협찬하여 일반 민의를 창달할 계획으로 조직한 인천 유지간담회에 평의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3년 3월 11일 조선물산소비조합 발기인 모임에서 연설(우각리 공립보통학교)하여 참석한 청중으로부터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경제적 빈곤으로 병원진료도 못 받는 노동자들의 권익보호 및 생활지원을 위한 구조조합 창립에도 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5월 9일에는 양제박, 김헌식, 곽상훈 등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이념 노선의 차이와 갈등으로 청년단체가 분파되어 활동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운동이 계급타파와 파벌을 없애기 위한 단체로 신정회를 창립하였는데 나시극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신정회의 취지문을 살펴보면 그의 민족정신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新正會 趣旨書

吾人이 이 世上에 生活할 때 生活의 外觀으로만 보면 各各 自己의 힘으로 努力한 結晶으로써 옷입고 밥먹게 되는 狀態임으로 다른 사람에게 힘입을 것도 업고 또 다른 사람과 協同할 必要가 업는 것 갓다. 果然 現下의 野俗한 世情이 그러한 생각에 흐르는 傾向이 더욱 現著하다. 그러하나 우리가 當場 먹는 쌀로부터 萬般의 것이 무엇 하나 나의 힘만으로 生産한 것 안임을 簡單히 生覺하라 다른 사람의 힘과 나의 힘이 協同되여 비로소 살게 됨이 明白하다. 今日 吾人의 環境이 政治的으로는 이미 破滅하엿고 經濟的으로도 正히 危機에 當面케 된 原因이 어데 잇느냐 其 由來를 正觀하라 間接으로는 科學文明이 뒤진 것도 큰 原因이다. 그러나 가장 큰 直接原因은 벌서 오래 前부터 各其 自己만 살자고 分離 孤立 反目을 일삼은 것이 今日 大同이 독가치 破滅하고 또 危機를 當하는 結果를 지엇다.
거의 破滅된 오날에도 更生할 光明한 길이 잇스니 그 일홈이 무엇이냐 굿세히 끗까지 團結하는 그것이다. 이 發起한 新正會라는 것이 其 活路인 團結體의 일흠이다. 이 新正會라는 團結體를 만드러서 廣漠한 理論을 떠나고 곳 現實에 나가서 問題를 解結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다치 仁川에 生活 根據를 두엇스니 仁川에 잇서서 모든 行政施設로부터 萬般 社會現象에 이르기까지에 모든 不合理한 일은 合理하게 不正義한 일은 正義롭게 될 수 잇는데까지 着實히 向上暢達을 圖하며 또 스사로 猛省하야 가자는 것이다.
仁川 生活群의 一分子된 이는 新正會로 모이라 우리가 團結치 못함으로 因하야 그 悲慘한 景狀을 다가치 가슴 압흐게 體驗하야 보고도 또 各各 따로 分立하여야 하겟는가 그래서는 참 크게 안되겟다는 一念이 누구에게나 가슴 속속 깁히 쇠 못 박혓스리라. 이 新正會로 모듸여 絶對强한 뭉치가 되자.

◇ 綱領

一. 우리 나라의 生活意識의 覺醒을 促進함.
一. 우리는 現實의 合理的 解決을 期함.
一. 우리는 正義의 涵養을 圖함.
一. 우리는 團結의 鞏固를 期함.
(동아일보 1927.5.12.)

7. 각종 기부활동

1923년 7월 16일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 음악회에 2원을 기부하였고, 1924년 조선자선회 임시총회에 10원을 기부하였다.
1925년 12월 7일 이재민 구조활동을 위해 1원 기부, 1926년 11월 30일 영화학교 운동장 확장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인천의연 연극공연에도 30원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는 김진호목사의 맏사위 홍호가 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영화학교 정상화를 위해 기부한 것으로 보인다. 소년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1927년 12월 10일 인천소년군 주최 활동 사진대회에도 3원을 기부하는 등 병원 운영을 하면서 얻는 수익 일부를 인천지역 사회에 아낌없이 기부활동을 하는 의인의 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8. 의술

1920년 인천부 조선인 의사가 경영하는 개인병원은 경동 고주철의원이었다. 고주철은 경성의전 전신 조선총독부 부속 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경동 애관극장 앞에 고주철의원을 개원하였다, 강화나 개성에서도 환자가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또한 나시극이 경영하는 용정 평화의원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병원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는 빈민들이 주 환자였다.

-1924년 3월 30일 화수동 전보배달 자전거에 치인 8살 어린이를 응급 치료
1927년 5월18일 용리 92번지 김모(36)가 자택에서 아편을 먹고 자살하다가 파출소 신고. 응급조치로 살아남

나시극이 의학 공부를 위해 인천을 떠날 때 평화의원을 인수할 수 밖에 없었을 때도 후임 의사도 개원기념으로 열흘 간 무료진료를 실시할 정도로 인술을 베푼 의사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동아일보 1931. 12.7.)

9. 떠남

나시극은 1931년 12월 인천에서의 10년간 의사활동 및 각종 종교 사회활동을 접고 경성의과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하고자 하였다. 평화의원과 의학 공부를 겸해서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세브란스 의전 후배 조동호에게 인수하고 서울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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