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920년 인천부 신화수리에서 태어났다. 레슬링 선수 김석영과 친분이 두터워 일본인의 혹독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에 적극 응징을 가했던 열혈 청년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악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화수동 건달이기도 하였다. 그의 별명은 그가 전통무술 택견, 유도, 권투 등 각종 격투기를 익힌 고유단자로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을 보면 즉시 달려가 초죽음을 만든다고 붙여진 것이다. 건달로 유명했지만 일본 메이치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메이치대학 출신이면서 레슬링선수로 이름을 날린 김석영과는 절친한 관계였다. 두 사람은 반일 의식이 강한 민족청년으로 일본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하 화수동에는 권투선수 최관오가 박유필, 한기동 등과 함께 화수동-만석동 일대 반일의식이 강한 청년들을 결집시킨 건달패가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열혈민족 청년이었다. 일제 말기 화수동 운교 건설 공사에 동원한 연합군 포로를 빼돌려 함흥을 거쳐 연해주로 해서 영국으로 귀환시키는 일도 있었는데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화수동 운교를 건너 전동을 비롯한 일본인 거주지로 들어가 일본인에게 위협, 협박 등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민족 울분을 해소하기도 하였다.

화수동 건달패가 인천부민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1935년 조선인 박영섭이 수문통 양변가에 벌집 모양의 시장을 개설하하고 유도 사범 유창호가 배다리 개천가에 야시장을 운영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일본인의 간섭과 횡포를 막고 조선인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 무도권에서 유도, 권투를 배운 유창호의 제자들이었다.

일제가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광업, 토건 현장, 군수공장으로 조선인을 동원하고 1944년부터는 징용, 징병 등 강제동원체제로 들어가면서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이 시기에 화수동건달패는 부랑아 행세, 정신병자 행세를 하면서 강제동원을 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군수기업 공장에 강제동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제노동, 임금착취, 장시간 노동 등을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은 이들을 노골적으로 기피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징병도 탈영, 불복종으로 문제를 일으켜 조선인 건달은 꺼려 하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최대한 활용한 것은 화수동 건달패였다. 조직적으로 일부러 부랑아, 정신병자가 되어 떠돌이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정인옥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부랑아, 정신병자 행세로 위장한 화수동 건달패들에게 아지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하였다.

2. 해방 직후 인천치안대 및 화수동 건달패 활동

해방이 된 다음날 정인옥은 인천 치안대 조직에 앞장서 화수동 건달패를 합류시켰다. 인천 무도관 유도사범 이임옥을 대장으로 선출하고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대한 신체적, 재산적 피해가 없도록 하였으며, 혼란을 틈탄 도난, 강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정인옥은 인천치안대가 각 정, 동의 자치보안대 조직을 관장하여 해방 이전보다 치안이 안정되게 하여 범죄 발생 건수가 급감시켰다.

정인옥은 최관오와 박유필과 함께 화수동 건달패들이 다시 개장한 송현상용시장을 관리하면서 미군군수품을 하역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빼돌린 생활용품을 전재민들이 팔도록 하였다. 이것이 동인천 양키시장의 시작이었다. 배다리 야시장을 개설한 스승 유창호와 좌우 이념의 차이로 갈등이 심화되었면서 완전히 갈라섰다. 유창호는 율목동 무도관을 배다리로 이전시키고 수제자 김수복을 비롯한 유도 제자들을 내세워 화수동 건달패의 세력 확장을 막는 한편 화수동-만석동 전평 조직을 와해시키는 전사로 활동하게 하였다.

인천시청은 화수동 건달패의 자금줄인 송현상용시장을 폐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장 상인들의 반발로 철회하였다. 대신 우익진영 유창호가 배다리중앙시장을 개설하여 관리하도록 하는 등 화수동 건달패의 배다리 시장 장악을 막고자 하였다.

3. 좌익 정치활동

정인옥은 김석영과 함께 정치적 지향점이 같은 동지 남외과 원장 남기목을 따라 조선민족혁명당 인천지부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남기목은 중앙군관학교 군의부장을 맡을 정도로 김원봉과는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었다. 김원봉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을 때, 남기목은 민혁당 인천지부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으로 김용규, 간부로 김석영, 정인옥, 한동진 등을 선출하였다.

1946년 5월 5일 정인옥은 민주청년동맹 인천지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화수동 청년운동의 대부 권충일, 심재형을 끌여 들여 지도를 받았다.

정인옥은 1947년 3월 22일 인천좌익진영의 총파업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좌익세력을 테러하는 우익세력을 해산하고, 그 주동자를 처벌하라!’, ‘민주주의 제단체의 탄압을 절대 반대한다!’, ‘노동자의 군리와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경찰 행정 사법 생산기관에 등용되고 있는 친일파 친파쇼 분자를 숙청하라!’ 등을 요구하며 인천 전평 산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일부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하게 하였다. 이 총파업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이에 인천경찰은 총파업 주동자 700명을 검거하는 등 강경대응을 하였다. 이때 정인옥도 검거되었다.

그리고 이후 신탁통치 찬반 갈등을 겪으면서 우익세력의 좌익세력에 대한 백색테러 탄압은 경찰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자행되었다. 그러면서 인천 좌익진영은 크게 쇠퇴하면서 급기야 1947년에는 인천인민위원장 김용규가 탈당선언을 하였다. 특히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이런 우익진영의 탄업을 견디지 못하고 1948년 2월 인천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이상운이, 1948년 5월 남로당 인천지부 위원장 이보운이, 그해 9월 민전 의장 박남칠이, 1949년 12월 남로당 선전부장 윤석준이 탈당하면서 인천 좌익세력을 와해되었다.

특히 1949년 4월 좌익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함으로써 과거 좌익 활동에 가담했던 죄를 씻어주고 온전한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국민보도연맹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게 반발한 인천 좌익진영의 인사들은 월북하였다.

4. 월북 후 강동정치학원 활동

정인옥은 동경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 김요한, 의사 남기목, 의사 김창식, 보안대장 이임옥, 남로당 송공삼과 함께 월북하였다.

1948년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월북한 남로당 출신을 비롯한 좌익인사는 약 10만 명 이상 이었다. 남로당 출신을 비롯한 월북한 좌익인사들은 대부분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하였다.

1948년 7월 박헌영의 월북지령에 의해서 북한으로 들어간 이승엽은 대남사업을 지도하는 책임자가 되면서 남한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유격대 투쟁을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하기 위한 군사교육기관 강동정치학원을 세웠다.(이현주, 이승엽(남로당)의 통일운동과 좌절)

정인옥이 들어간 강동정치학원 상황은 이렇다.

“1947년 12월 이후 이들은 부수상이자 외상인 박헌영의 혁명 지령에 따라 남조선테러리스트 등을 훈련시켜 왔으며, 현재도 훈련시키고 있다. 1948년 3월부터 현재까지 총 915명의 남자와 103명이 여자가 이 학원을 수료한 후 남조선 대중을 선동하거나 테러할 임무를 띠고 남조선에 파견되었다.”(대성리 강동정치학원의 게일링(3급비밀) 이정 박헌영 전집7)

정인옥은 강동정치학원 정치반에 편제되어 5개월 군사교육을 받았다. 정치반은 주로 남한 유격대로 파견되어 당간부로 활약하였다. 정인옥은 1949년 9월 6일 강동정치학원 5개월 교육을 마쳤다. 군사교육을 이수한 학생 360명은 이승엽이 직접 편성한 인민유격대 제 1군단에 배치되었다. 이들을 지휘할 인민유격대 제 1군단장은 이호제를 임명하였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좌익운동가가 된 사람이다. 1945년 12월 전조선청년단체총동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남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아 좌익청년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월북하여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정인옥은 제 1군단은 5개 중대로 편제된 제 1군단 정치지도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승엽은 인민유격대 제 1군단 간부로 정치위원 박치우, 참모장 서철을 포함시켰다. 정인옥은 제 1군단 360명과 함께 강동정치학원 소재지 승호역을 떠나 화물기차로 양양까지 이동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38선을 다시 넘어 남하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빨치산 무장투쟁역사)

5. 인민유격대 활동 및 귀순

정인옥은 낮에는 야산에서 자고, 밤에는 이동을 하면서 오대산, 점봉산, 태백산까지 남하하였다. 그러나 제 1군단은 이동하는 가운데 국군 8연대의 집요한 토벌작전에 거의 전멸되고 100여명만이 생존하여 다시 월북하거나 남하해 김달삼부대에 합류하였다.

1949년 11월말 태백산 전투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정치위원 박치우가 사살당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박치우와 함께 조선인민유격대 정훈교육을 담당하였던 정인옥은 큰 충격을 받았다. 태백산 아지트도 국군토벌대의 집요한 추격에 의해 위태한 상황이 되면서 이를 피하고자 한 고난의 행군만 하고 있었다.

정인옥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계급적 모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모순, 빈농과 지주간의 모순 등으로 자본주의는 점차 붕괴될 것이고, 능력껏 일하고 그 능력만큼 댓가를 받는 공산주의가 필연적으로 올 것이다‘는 확신은 사라지고,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를 갖으면서 국군토벌대에 귀순하였다.

정인옥은 1950년 4월 29일, 4월 30일 서울 창덕궁에서 양일간 열린 육군 정훈국 주최 ‘귀순병과 시민과의 접회’에 귀순병 대표로 참석하였다. 귀순한 정인옥은 공산주의의 허상과 조선인민유격대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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