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 성장과정

김요한은 1922년 영화보통학교를 나와 1925년 배재고보를 졸업하였다. 그해 동경제국대학 상경학부에 입학한 수재였다. 그는 명석한 두뇌, 탁월한 리더십, 치밀한 기획력을 가진 만능인이었다. 당시 인천 조선인 중에서 처음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한 것 자체로도 큰 화제였다.

김요한은 동경제국대학에서 사회주의 경제학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회주의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사회주의 혁명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1925년 동경제국대학 본관

김요한은 방학이 되면 인천으로 돌아와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보다 조직체계를 갖추고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유학생 모임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927년 8월15일 인천출신 일본유학생들을 모아 ‘인천일본유학생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창립 강연에서 “경제예측에 대하여“ 연제로 발표를 하였다. 세계 경제 동향과 일본 경제의 앞으로의 흐름을 예측하면서 이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2. 사회주의 이론가 활동 및 개풍상회 사무장 업무

1928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돌아와 국내 사회주의 핵심활동가와 비밀 내통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을 전달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핵심활동가 이외는 절대 노출시키지 않았다.
 
김요한은 배재고보 1년 후배 이성국의 부친이 경영하는 개풍상회(인천부 내리 34번지) 사무장으로 일하였다. 개풍상회는 고무신, 운동화 등 신발류 도소매상이었다. 김요한은 전국 신발 판매 유통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일본의 중국 시장을 겨냥한 투자 흐름을 예리하게 판단하고 주거래 품목을 명주, 명사, 옷감으로 전환하여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무역업으로 전환시켰다. 개풍상회는 승승장구하는 유망 중소기업으로 성장하였다.

3. 인천에서 박헌영과의 인연과 사회주의 이론가 활동

1936년 김요한 개풍상회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이승엽이 함흥에서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재건운동에 거액의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 개풍상회 이성국도 이에 동참하였다. 이승엽이 보낸 함흥 첩보원 강탄구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1937년 함흥경찰에 적발되면서 김요한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후 김요한은 처남 이보운을 통해 정미업자 김용규, 미곡 중개상 윤석준, 인천 미곡상조합장 박남칠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미곡상, 정미업자, 미곡 중개인 등을 주 1회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고, 각종 사회주의 관련 유인물을 배부하였다.

1940년 2월 박헌영이 인천부 도산정 아지트(현 이화순대 야외주차장 추정)에 다시 잠입하여 회지 「꼼뮤시스트」 등 각종 기관지를 발행할 때 극비리 제작 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이강국, 김사국, 이관술 등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안전하게 만나게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이후 박헌영이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송림리, 창영정 86번지로 아지트를 알선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창영정 86번지 아지트는 근처에 남녀 미선교사 합숙소가 있었고, 처남 이보운의 장인 김태진이 경영한 미국 교포 물산 중개회사 국산사 대리부가 있었다. 물류창고도 있었다. 아지트 옆에는 공동우물이 있어 사방으로 통하는 골목길이 있어 일본 경찰에 발각되더라도 도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김요한은 박헌영이 인천 아지트에 은신하고 있는 사실을 처남 이보운 이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조봉암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정도로 보안을 철저히 하였다.

1938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일본 쌀 수출과 군수미의 안정적 보급을 위해 미곡시장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간파한 김요한은 인천미곡상조합의 조합장 박남칠을 비롯한 핵심 임원들에게 강온 대응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당시 관행이었던 쌀 정량 속이기를 철폐하고 용량을 통일해서 가마당 오두 외에 고봉 한 되를 더 추가 판매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쌀 한가마니를 사면 한 되에서 석 되까지 용량을 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서 인천부민에게서 원성이 많았다. 인천미곡상조합 차원에서 정량 판매 조치는 그동안의 인천 미곡상에 대한 불신을 없애면서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는 1940년부터 공출제가 실시되면서 조선총독부가 미곡 구매에 직접 개입하는 제도를 마련해 미곡상과 정미업자 그리고 미곡중개업자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쌀뿐만 아니라 곡물 전체를 공출하도록 함으로써 미곡상, 정미업자, 곡물 중개인들은 자유 거래를 할 수 없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미곡 상거래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이승엽을 사무장으로 영입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인천미곡상조합 차원의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역할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승엽은 1940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조봉암의 권유로 사상전향을 하고 석방되었다. 1941년 인천미곡상 조합은 이승엽을 사무장으로 채용하는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김요한의 지도로 조합장 박남칠과 이보운은 직접 나서서 조합원들을 설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4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공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농가마다 공출량을 할당하고 지정된 공출쌀 이상을 수집하기 위하여 식량배급조합을 설립하여 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곡상, 정미업자 그리고 미곡 중개업자들이 강제로 가입하도록 하였다.

이에 인천미곡상조합은 적극 대응하기 위해 조합원들이 인천식량배급조합에 가입하고 사무장 이승엽을 상임이사를 맡도록 하였다. 이승엽은 상임이사를 맡아 조선인 미곡상, 정미업자, 미곡중개업자들을 직접 관리하였다.

1943년 이승엽은 인천식량배급조합에서 식량 수매를 독점하여 조선인 소비자에게 불공평한 배급 실시를 사전 막아냈다. 이러면서 1944년 조선총독부가 식량 전량 수매를 조선식량영단을 만들어 일임함으로써 인천미곡상조합을 해산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김요한은 박헌영을 만나 이승엽이 인천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서 조선인 미곡상과 정미업자들을 보호하고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동지 또는 기반 획득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4. 해방기의 사회주의 이론가 활동 및 월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김요한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사람들이 석방되면서 좌우익을 불문하고 대단한 대우를 받았다. 인천에는 조봉암과 권충일이 있었다. 그러나 권충일은 사상전향을 하고 대화숙에서 적극 친일행위를 한 전력으로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조봉암이었다.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에 의해 용산헌병대 구치소에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내려오기 직전 몽양 여운형을 만나 치안대 조직과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라는 말을 들었던 까닭에 당시 인천지역 열혈민족 청년들은 조봉암이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조봉암은 8월 15일 저녁 기차편으로 상인천역에 도착하여 도산정 부영주택으로 돌아왔다. 경동사거리와 애관극장 앞에서 해방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유도사범 이임옥 등 10명의 청년들이 찾아왔다. 이들에게 치안보안대 결성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조봉암은 8월 16일 김용규, 권충일, 박남칠, 이보운, 유두희, 권평근 등과 회합을 갖고 인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제안하여 적극 동의를 얻었다.(이원규, 조봉암 평전)
인천 건준은 위원장으로 김용규을 맡았고, 박남칠, 이보운, 윤석준 등이 주요 임원을 맡았다. 조봉암과 권충일은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서 10월 5일 인천건준을 인천인민위원회로 재편하면서 김요한에게 사회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인천미곡상조합 간부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들과 노선이 다른 조봉암과 권충일은 배제되었다.

김요한이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은 12월 31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5년 식탁통치반대 시민결의대회 결의문 작성기초위원으로 김용규(인천인민위원회 위원장), 이보운(인천인민위원회 총무부장), 곽상훈(한민당 인천지부장), 손계언(인천신문 기자회 부위원장)과 함께 선임되면서였다.

그러나 좌우익 세력이 신탁통치 찬반으로 갈라지면서 본격 갈등이 드러나면서 김요한을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접고 지하활동을 하였다.

1949년 4월 국민보도연맹 결성을 앞두고 남로당 남기목, 이임옥, 송공삼, 정인옥 등 10여명의 남로당 당원들과 함께 월북을 하였다. 월북 후 강동정치학원에서 무장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서도 김일성에게 면담을 요청하면 즉각 응할 정도로 사회주의 이론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김요한은 한국전쟁 인민군 점령 시기 남하하여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당시 인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다시 월북하엿으나 1953년 이승엽 쿠데타 모의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신태범박사는 이렇게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김요한이 인천상업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유학하고 귀국 지식인으로 명석한 사회주의자 이론가였다. 해방직후 표면에 나서지 않고 주로 배후에서 좌익활동을 한 인물이었으며, 인민위원회 총무부장인 이보운과는 처남 매형 사이라고 한다.”(이윤희, 미군정기 인천에서의 좌우투쟁 전개)

2010년 이보운의 조카 이**(전 한국기자협회 사무처장)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였는데 선친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도 그렇고 자신이 어릴 때 목격한 바로는 작은 아버지 이보운은 박남칠과 함께 매형 김요한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봉암, 이승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게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김요한은 인천미곡상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사상으로 의식화 교육을 하였으며, 해방 직후 건준, 인민위원회 남로당 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라고 하였다.

김요한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하에서 활약한 사회주의 이론가였기 때문에 조봉암과 이승엽에 가려 그의 존재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윤희의 논문 미군정 인천에서의 좌우투쟁전개에서 김요한의 존재를 간략하게 소개할 뿐이지 그의 활동이나 역할은 밝히지는 않았다.

1920대 후반부터 1930년말까지 조봉암과 이승엽은 인천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1930년대말 인천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요시찰 인물로 혹독한 감시를 받아 원활한 활동을 하는데는 제약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김요한은 이들과 달리 1928년 동경제대 졸업 후 인천에 거주하였고, 이보운의 매형이었기에 김용규, 박남칠, 윤석준, 남기목, 김창식, 이임옥 등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의식화시켰던 것이다.

해방 후 이승엽의 인천 부재, 조봉암의 전향선언 등으로 좌익진영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에도 쉽게 와해되지 않고 온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요한의 영향도 한 부분을 차지한 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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