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길 작가

 나는 지금 초등학교 졸업앨범과 파일속에 보관 중인 생활통지표(단기4291년도)를 보고 있다.

앨범 첫 장에는 수십 명의 선생님들 단체사진이 보이고 빛바랜 습자지 겉장에는 흐릿하게 선생님들 이름이 세로로 적혀있다. 그 아래 장에는 4학년 때 담임이셨던 K 선생님의 단아한 모습도 보인다.

유년시절, 내 정신 건강을 살찌워주신 분으로 그 시절 학동시절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이리라.

생활통지표 속의 가정으로 보내는 통신란에는 잉크로 깨알 같은 작은 글씨가 또박또박 써져 있다.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말이 없는 아동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기의 할 일을 완수하는 진실한 어린이입니다. 학업에도 성의가 있고 성적이 매우 우수한 편입니다.’

바로 K 선생님의 필체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내 학업성적은 미와 양뿐인 열등생이었다. 그러나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상위권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사범학교를 갓 나온 K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고부터 어이없게도 ‘선생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자’며 정진한 결과 1학기 발전상을 받고나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이다.

선생님의 학습방법은 매일 공부 시작 전 칠판에 구구단을 빼곡히 써놓고 외우게 하거나 백 단위 곱셈과 나누기 연습문제를 10여 개씩 출제하곤 풀고 또 검산으로 풀게 하는 등 반복하여 숙달토록 조련하셨다.

지금은 계산기로 한두 번 누르면 끝나는 문제를 지겹도록 끙끙대며 풀던 것이 오늘 날 숫자계산과 암산을 수월하게끔 할 수 있게 된 소중한 자산이 아닌가 싶다.

사회시간에는 당시 세계인구가 지금의 1/3인 27억 명 정도였고, 독립국가가 100여 개국으로 그 나라 수도를 모두 외우도록 강제 한 것이 지금까지 웬만한 나라 수도를 기억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보건시간에는 감기예방에 좋은 거라며 마른수건으로 건포마찰을 시켰는데 덕지덕지 붙은 때를 씻게 한 연유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선생님의 교육방식은 요즘같이 체계적이고 앞질러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움에 왕도가 없다’는 말처럼 꾸준함 속에 반복과 암기를 위주로 한 보수적인 방법이었다.

특히 글짓기 시간에는 우수작을 뽑아 직접 읽게 하시고 칭찬을 하셨는데 언제나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몇 차례 읽을 기회를 얻으며 칭찬과 관심을 받으니 자신감을 얻은 때문이리라.

소위 요즘 심리학 용어 중에 피그말리온효과(Pygmalion effect)가 컸던 모양이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 기대하거나 예측하는바가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를 일컫는데 어느 교사가 학생에게 성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를 갖고 지속적으로 표현할 때 학생은 이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실제로 성적이 오른다는 뜻과 같은 현상이다.

지금 생각해도 웃는 듯 마는 듯 잔잔한 미소와 화장기 없는 청순한 얼굴에 몇 개 돋아난 여드름, 그리고 검은 치마와 흰색저고리가 잘 어울리던 조신한 모습 …. 조그만 입으로 차분하고 나직하게 국어책을 읽어 내려가면 그 입을 정신없이 쳐다보다 눈이 마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순간 죄지은 듯 부끄럽고 두근거리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백 년 전통에 전교생이 5천 명을 넘었고 2부제 수업을 할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6·25 휴전 후 배움의 시기를 놓친 형과 누나들과 동급생이 되어 한 반이 80여명이나 되는 소위 과밀학급이었다. 그러다보니 머리 큰 남자애들은 선생님 말씀도 잘 안 듣고 성숙한 여학생 중에는 젖가슴이 봉긋하게 솟아 오른 애들도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 청소하던 교실 책상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앳된 처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랴, 통솔하랴 힘에 벅찼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 청소당번 몇 놈이 뺑소니까지 쳤으니 속이 상한데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북받치셨던 모양이었다. 청소를 멈춘 여자애들은 선생님 주위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남자애들 몇몇은 복도를 서성이며 눈치만 살폈다.

당시 실 과목 중에는 길거리 청소봉사시간이 있어 인솔 나온 선생님을 향해 지나가던 청년들이 짓궂게 휘파람을 불거나 입속에 두 손 가락을 집어넣고 “삐익” 소리를 내며 희롱을 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도 못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참 나쁜 아저씨들도 다 있네.’ 하며 미워했던 생각도 난다.

어느 때 학년별 전 과목 시험을 치룬 날에는 옆 반과 교차채점을 하곤 했는데 시험지 분량이 많아 방과 후 몇 명을 남게 하여 선생님의 채점을 돕기도 했다. 그럴 때 선생님은 학교 앞 ‘꿀꿀이 동네’에서 미군부대에서 반출된 쇼빵(식빵)과 설탕을 뿌린 꽈배기를 사오게 하여 둘러 앉아 먹곤 하였다. 시장할 때 먹는 간식이라 맛도 맛이지만 이때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시던 선생님의 풋풋한 사랑이 더욱 좋았다.

간혹 숫기 좋은 반장애가 파마한 선생님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지며 어디서 얼마에 했느냐는 등 어리광부리듯 했음에도 선생님은 그저 웃기만 할뿐 가벼이 넘기곤 했다. 아마 누이 같은 마음이었을까 스승의 웅숭깊은 마음이었을까 그것이 지금도 궁금하다. 실행에 못 옮겨 그렇지 나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흘러간 유년의 추억이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어우러져 온몸을 감싸고돈다. 반세기가 넘었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수한 동심이 허허롭기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애틋한 정을 간직한 채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아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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