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부두 사진 출처 김식만의 네이버 블러그

인천 내항 제8부두 앞에 섰다. 하늘 높이 쌓인 컨테이너와 커다란 화물선이 육지 위에 솟은 듯 눈앞을 가린다. 징표삼아 부두 정문을 배경으로 스마트폰으로 한 컷 찍는데 오래된 상념이 되살아나 옛 생각에 잠기게 한다.

월미도 입구인 이곳은 선창과 어시장 그리고 밀을 하역하던 부두였다. 상전벽해라고 할까 기억 속의 세상과는 전혀 딴판인 이곳이 어디쯤일까 가늠조차 안 된다.

그러나 일등급 곰표 밀가루를 만들던 제분회사를 기점으로 도로는 그대로다. 동네로 들어가는 진입로도 낯익은데 일부 건물을 철거한 듯 아스콘으로 포장하여 산뜻하다. 주거환경개선사업도 했는지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채색의 담장과 지붕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좁은 길 안으로 들어서니 2층 목조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 검게 그을린 채 지붕을 받치고 서있고 그 사이를 겨우 지나다보니 옛거리를 걷는 기분이다.

작은 메모지 한 장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니 무슨 조사원으로 오해했는지 몇몇 아낙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유심히 쳐다본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서니 대한싸이로 정문 좌측에 그 유명한 레드비치(적색해안) 표지석이 보인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전함 261척이 상륙군 미해병 제1사단과 한국해병 1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킨 3개 지점(청색, 녹색, 적색해안) 중 한곳이다. 이곳에서 월미도는 1킬로미터,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은 900미터 거리에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학창시절 교사(校舍)가 월미도로 이전하면서 등, 하굣길이 된 연유였다.

당시 월미교 양안은 공장부지 매립을 위해 파이프라인을 통해 칙칙한 준설토를 쉬지 않고 토해내고 있었다. 그 한편에는 월남에서 가져온 고철더미와 원목들이 산처럼 쌓여있고 빈곤을 타파하자는 혁명정부의 살림밑천이 되기도 했다. 이후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용광로의 쇳물이 되었고 경제부흥의 초석이 되었으리라.

급우 J군은 매주말쯤이면 그 부두로 나를 데리고 갔다. 대청도에서 유학 온 그 친구는 옛 인천대 교정이 된 부처산 꼭대기 어느 친척집에서 유숙을 했다. 그 집 뒤쪽은 붉은 흙을 깎아 ‘앙골라’, ‘친칠라’같은 토끼 종류를 많이 길렀는데 모피와 육류를 장려하던 정부시책에 따른 부업이었다. 그는 방과 후면 토끼 먹이를 위해 부처산을 오르내리며 풀을 베어 오기도 했는데 지겹고 힘들다며 부둣가 나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부두에 가면 대청도를 오가는 ‘승동호’란 짐배가 그곳에 정박해 있었다. J군 아버지가 그 배 선원으로 있어 집에서 보낸 먹거리를 받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쾌속선으로 4시간이면 오가지만 그 당시는 20톤쯤 되는 목재 통통배여서 하루가 꼬박 걸리는 먼 거리라고 했다. 짐속에는 말린 해산물과 하얀 색깔의 고구마, 약간의 밑반찬이 들어있던 기억이 난다.

그 부두 호안은 수직 벽으로 되어 있어 밀을 화물선에서 받아온 끌배들 수십 척이 가로로 나란히 늘어섰고 각 배마다 길이가 10미터쯤 되는 외나무다리를 육지에 걸쳐놓고 통행을 하였다. 폭이 50센티쯤 되어 한 사람 건너기에도 빠듯한데다 물때 따라 경사가 달라져 간조 때는 기울기가 45도 정도로 가팔랐다.

이 광경을 보곤 오금이 저리고 아찔했지만 밀을 하역하는 아저씨들은 어깨에 짊어진 들통의 탄력과 조화를 맞추며 능숙하게 곡예 하듯 잘도 오갔다.

그네들 장딴지는 시퍼런 핏줄이 뱀처럼 구불구불 튀어나와 강인한 모습들이었다. 요즘엔 그것이 힘든 노동으로 피가 하체에 몰린 하지정맥류라는 병으로 알려졌지만 그때는 건강의 표시로 생각했으니 몰라서 그랬던 거다.

어찌 보면 산업역군이라는 멍에를 지고 땀과 눈물 아니 목숨을 담보로 이일을 했을 수많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눈물겨운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도크 내항에 접안한 본선의 밀을 흡입펌프로 공장까지 직접 운반하지만 당시만 해도 끌배에 옮겨 싣고 인력으로 하역을 했으니 흘리는 낙곡도 많았다. 더구나 새까맣게 몰려드는 참새와 비둘기의 먹이 천국까지 되었으니 이래저래 엄청난 양이 태평양을 건너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아깝게 소실되었으리라.

부두 초입에는 소매 어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항상 바글거렸다. 하역부두 앞에는 노무자들이 요기로 먹던 막걸리에 서비스 안주인 물텀벙이(아귀) 매운 찌개가 쇠철판 위에서 부글부글 끓던 목로주점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

지금은 고급생선이 되버린 아귀가 그때는 공짜로 주던 술국안주였다. 어떤 때 재수 좋은 주모는 아귀뱃속에서 미쳐 소화가 안 된 조기나 농어 같은 비싼 생선을 얻기도 했고 하역작업을 마친 아저씨들의 거나한 걸음걸이와 흥얼대는 노랫가락 소리에 하루해가 저물던 추억의 선창길이었다.

주점 뒤로는 뱃사람들이 즐겨 찾던 ‘풋사랑 18번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그 바다 정경과 애환이 함께 서려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검은 진흙탕 속에 사그라지던 그곳, 낡은 판자문위에 힘겹게 걸려있던 항구여인숙 간판도 눈에 선하다.

그땐 그랬다. 찌든 나무판자와 검게 그을린 기둥이 세월의 두께를 고스란히 안은 채 서있고 연탄아궁이가 고단한 삶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작부들 웃음소리 끊이지 않고 나그네의 풋사랑을 몸으로 안아주던 그야말로 부둣가 일 번지였다.

변해버린 것이 어디 이곳뿐이랴만 그때를 아는지 모르는지 질주하는 차량만 무심히 오간다. ‘지난날은 아름답다’는 어느 카피처럼 추억의 대가가 얼마인데, 파랑새를 쫒다 좌절하듯 우리네 삶이 그런 게 아닐까?

그러나 최근 접근성이 뛰어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내항 재개발을 통한 경기 부양책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근 40여 년 동안 원도심 주민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반사이익 하나 없이 요즘엔 출입 선박 규모가 달라지고 화물도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차제에 항만 재개발 로드맵을 통해 부산북항이나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처럼 시민들이 쉽게 다가서고 관광객 유치와 배후도시를 개발하여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내항의 랜드 마크를 되찾고 그 바다를 시민에게 돌려주어 자긍심을 일깨워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보안시설로서 쉽지는 않겠지만 반세기 이상 군사용지로 묶여 있던 월미도가 문화와 휴식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돌아온 것처럼 예지를 모은다면 이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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