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강화 석릉의 주변 고분군 2차 발굴조사설명회와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 학술발굴조사

 -사적 제369호인 강화 석릉의 주변 고분군 2차 발굴조사 4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공개

-강화 고려 강도(江都)시기에 건립된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 학술발굴조사 지난달 31일 개토제

사적 제369호인 강화 석릉의 주변 고분군에 대한 2차 발굴조사에 이어 강화 고려 강도(江都)시기에 건립된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 조사 등 강화지역 문화재 등 학술발굴조사사업이 관심을 끌고 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지난 5월31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8월까지 고려 강도(江都)시기에 건립된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에 들어간데 이어 사적 제369호인 강화 석릉의 주변 고분군에 대한 2차 발굴조사 성과를 4일 오후 2시부터 현장에서 공개한다.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고려 제21대 희종(熙宗, 1181~1237년, 재위 1204~1211년)의 능이며 발굴조사 현장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3번지 일대다.

 

▲ 석릉 주변 고분군 2차 발굴조사 출토 도기 일괄 ⓒ 인천뉴스

강화는 한강 이남의 유일한 고려 도읍지로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침략에 맞서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후 1270년(원종 11년)까지 39년간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강도(江都) 시대라 칭한다.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진행 중인 이번 2차 조사는 석릉 동쪽에 인접한 능선을 따라 축조된 고분 9기를 대상으로 했다.

 매장 주체부는 돌덧널무덤(할석조 석곽묘)과 판돌을 이용한 돌덧널무덤(판석조 석곽묘), 널무덤(토광묘) 등 비교적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묘역은 여러 단의 석축을 이용하여 구획하였고 봉분 뒤쪽 주변에는 낮은 담인 ‘곡장’(曲墻)을 두른 특징이 있었다.  

 돌덧널무덤(石槨墓)은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이며  널무덤(木棺墓)은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 주체부가 나무널로 된 것이며 곡장(曲墻)은 무덤 뒤의 주위로 쌓은 낮은 담이다.

▲ 52호, 53호, 54호 돌덧널무덤 전경 ⓒ 인천뉴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당시 상장례를 유추해볼 수 있는 유물인 지진구(地鎭具)가 나와 주목된다. 지진구는 건물을 짓기 전 땅의 기(氣)를 진압하여 안전을 빌기 위해 봉안한 상징물로, 석릉 주변 고분군에서 나온 것은 무덤을 쌓아 올릴 때 제의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진구 형태로는 도기호(항아리)와 동물모양의 철제 향로 다리 등이 발견됐다.

 도기호는 아가리가 넓고 목이 짧으며 몸통이 넓은 저장용기다.

이밖에도 40호 돌덧널무덤 후면 쪽에 석수(石獸)로 양과 호랑이 모양의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각각 1구씩 세워두었으며 인근 52호 돌덧널무덤 묘역에서는 사람모양의 석인상이 확인되어 고려 시대 묘역 구조를 밝힐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강도 시기 고분문화를 복원하기 위하여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석릉 주변 고분군에 대한 1차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1차 조사에서는 다양한 묘제의 고분 6기를 확인하고 도기병, 작은 유병(油甁), 중국 송나라(북송)의 화폐인 북송전(北宋錢) 등을 수습한 바 있다.

 

▲ 40호 돌덧무덤에서 나온 석양 ⓒ 인천뉴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석릉 주변 고분군을 비롯하여 강화 지역 능묘 조사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강도 시기 고분문화를 체계적으로 밝혀 나갈 예정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지난 5월31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8월까지 고려 강도(江都)시기에 건립된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강화중성의 남산리 구간

 강화중성은 고려 시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도를 강화로 천도한 이후 강화도성에 건립한 3개의 성곽(내성-중성-외성) 중 하나로, 강화읍 외곽 일대에 ‘⊂’ 형태로 둘러진 토성이다. 성곽은 길이 약 11.39㎞로, 기록(『고려사(高麗史)』권82)에는 성곽의 둘레가 총 2,960칸이며, 크고 작은 문 17개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조정은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침략에 맞서 강화로 천도한 이후 내성을 비롯하여 외성, 중성을 축조하였다. 강화중성은 1250년(고종 37년)에 지어져 1259년(고종 46년)에 몽골과의 화의에 따라 훼철(毁撤)된 것으로 전해졌다.

 강화중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9년부터 총 5차례 진행되었으며 일부 성곽 구간의 축조방법과 구조가 확인된 바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성곽의 부속시설이자 방어시설로 추정되는 목책 치(雉)와 외황(外隍)이 조사됐다.

  이번 조사는 강화중성의 서쪽 구간에 해당하는 남산 남사면 일대의 성곽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앞으로 강화중성의 구간별 축조방법과 구조, 성곽 내외부의 시설물을 확인해 나갈 예정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이번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강화도성의 성곽체계를 확인하기 위한 지속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고려시대 수도 역할을 수행했던 강화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심화연구를 병행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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