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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길 작가의 수필 '조 개 탕'
▲ 1970년대 송도갯벌 조개채취

세상에서 명물취급을 받게 되면 사람들 가슴속에 향수처럼 오래도록 기억나게 한다. 더구나 음식이 유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므로 그 전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어느 지방하면 무슨 음식, 무슨 음식하면 어느 지방을 떠올리게 되는데 소문이 퍼져 명물음식이 되면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도 하게 마련이다.

인천의 조개탕이 바로 그 경우인데 1960년대 초부터 조개양식장이 개발되어, 많이 잡히는 덕분에 자연발생적으로 별미와 명물로 자리잡아왔다. 특히 품질 좋은 생산지와 수도권이라는 대단위 소비지를 끼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원래 송도국제도시는 수백만평의 갯벌을 매립한 이름난 조개명산지였다. 조개만 전업으로 채취하던 어민이 한진, 척전, 동막, 고잔 등 4개 어촌계에 아낙네만 1,300여명이나 되었고 연간 수백억 원의 생산고를 올렸다.

주로 잡는 것은 맛좋고 개흙이 없는 백합(상합 또는 대합)과 가무락(모시조개)인데 조개탕용이다. 흡수공이 거칠어 개흙을 머금고 있는 동죽조개는 볶음이나 건제품 용도로 까서 파는데 껍질은 생석회 만드는 원료로 쓰였다.

동죽은 번식과 성장률이 좋아 많은 곳은 한 평 정도에 천여 마리나 서식하여 사시사철 매일 캐내도 줄지 않는 황금어장이었다.

갯벌10리 까지 조개가 서식하고 조석간만의 차이가 커서 노폐물이 씻겨나가 깨끗하게 유지되므로 살아가는 데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청학동과 동춘동 그리고 옥련동 일부지역을 전에는 통틀어 ‘먼어금’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대 아낙네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조상대대로 조개잡이를 해오면서 자녀들 학비와 살림살이에 큰 힘을 보탰다.

특히 옥련동은 조개탕이 유명하여 ‘조개골’로 소문이 났는데 지금은 해안도로가 생겨 모두 메워지고 뒤편의 소나무 있는 자그만 언덕에 능허대(凌虛臺)터란 포석만 남아있다.

능허대란 초기 하남위례성(경기도 광주)에 도읍했던 백제가 고구려 때문에 육지로 중국과 교류할 수 없어 부득이 바다로 내왕하려고 산동반도와 가장 가깝고 안전한 이곳에서 사신을 보내던 포구의 지명이다.

개로왕이 국서에도 쓴 것처럼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 험한 나루길, 목숨을 하늘에 맡긴다’고 했듯이 막강한 고구려 수군과 풍파를 피하며 가야했던 험난한 뱃길이었으니 돌아올 기약 없는 이별의 장소였다. 고구려 침공으로 웅진(충남 공주)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백여 년 동안 중국의 동진 및 송나라에 20여 차례의 사신을 보냈던 관문이기도 했다.

포구를 지척에 두고 별리현(別離峴)은 송별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나누던 고개였고 삼호현은 멀어져가는 사신일행을 아쉬워하며 소리쳐 세 번 불렀다는 고개였다.

능허대에는 기암(妓巖:기생바위)에 대한 전설도 있는데 백제의 사신이 이곳에서 배가 떠나기 위해 알맞은 바람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이든 기녀가 이별을 슬퍼한 나머지 범해(泛海:바다로 배를 띄움)하던 날 떨어져 죽은 곳이다. 이들의 사랑 얘기는 천년이 훨씬 넘은 세월에 묻혀 지금은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석만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 1970년대 송도어촌계 조개채취

조개골을 따라 어장에 들어간 여인네들은 서해바다 아스라이 수평선이 이어진 머나먼 갯벌위에서 머리에는 흰 수건을 쓰고 치마는 걷어 올려 허리띠로 졸라맨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렸지만 잠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고 조개 채취에 바쁘다.

이윽고 밀물이 되면 망태에 담아놓은 조개를 소달구지가 실어내오고 그 뒤를 조개껍질로 단단하게 다져 놓은 좁은 해로(海路)를 따라 빈 몸으로 줄지어 나오는데 흡사 군인들 행진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자칫 대오를 이탈했다가는 발목과 무릎까지 빠져버려 달리 비켜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 맑은 공기와 대여섯 시간의 갯벌걷기, 그리고 흙을 파헤치는 노동 후에 맛있는 식사는 건강의 필수 조건이고 구리빛 얼굴에 힘찬 발걸음 그리고 대단한 엉덩이와 팔 힘은 웬만한 남자 뺨치는 체력들이었다.

조개 중에도 백합은 일본말로 ‘하마구리’라고 하며 비싼 값에 대부분 수출된다. 어느 해 겨울 혹한으로 대량 동사하여 얼어터진 것을 어장 보호를 위해 수거하여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는데 신선도에 문제가 없어 연탄화덕에 구워 생각지도 않게 포식을 한 때도 있었다.

굽는 냄새는 물론 노르스름하게 익어 쫄깃하고 달콤한 하얀 속살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거기에다 소주 한 잔 곁들이면 바다내음과 함께 촉촉한 것이 입맛을 마냥 당기게 한다.

조개 애호가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소암마을 척전 어촌계와 능허대 앞 조개골에 모여 든다. 거기에는 바닷가에 원두막 같은 집이나 가정집을 개조하여 조개탕을 전문으로 파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다.

메뉴는 조개탕과 구이, 회가 전부인데 조개의 짠듯하며 달착지근한 오묘한 맛 때문에 술안주로도 괜찮지만 밥과 함께 먹을 수가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

밀려오는 파도와 진한 해조음을 들으며 먹는 조개탕이야말로 바닷가의 진미라 아니 할 수 없는데, 원료 자체가 갓 잡아온 신선한 것이기 때문에 단맛과 독특한 향미는 먹는 사람을 반하게 만든다.

조개탕은 잘 씻은 조개를 센 불에 한소끔 끓인 후 약한 불에 파, 마늘, 후춧가루만 넣는 것이 전부다. 끓이는 도중 솥뚜껑을 열었다가는 놀란 놈들이 입을 벌리지 않아 낭패를 보게 되어 솥뚜껑만큼은 누구든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이윽고 내놓은 조개탕은 엷은 하늘색 국물 속에 입을 딱 벌리고 있어 손으로 한 개씩 집어 입으로 까먹는데 남은 국물은 짭조롬하고 시원하여 주당들 숙취에는 그만이다.

그 국물에 당근을 잘게 썰어 넣고 끓인 흰죽은 각종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하여 영양식으로 알아준다. 더불어 시장하고 바쁠 때에는 조개탕 라면으로 한 솥 끓여 먹는 맛 또한 근사하다.

구이는 여럿이 있을 때는 손이 바빠 차례가 별로 오지 않고 회는 비릿한 맛 때문에 모두가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큰 솥이나 양푼에 끓여내는 조개탕만큼은 누구나 즐긴다.

국물은 조개껍질로 떠먹는 것이 제격인데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색다른 재미도 느끼게 한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 취기가 오르면 분위기도 무르익어 재담이 나오고 비유와 은유로 질펀한 Y담으로 옮겨간다.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시절 불문율처럼 정치나 직장 얘기는 아예 접고 야릇한 얘기가 무난하다는 선배들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별소리를 다 듣는다.

이윽고 입에 거품을 물던 K선배가 별 볼일 없던 접대부 얼굴이 황진이처럼 예뻐 보인다며 짓궂은 행동을 개시하고 흥겨운 젓가락 장단 소리에 바닷가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조개탕은 별미로서 찾는 사람이 많지만 조개를 먹기까지 경로는 그리 쉽지 않다. 입을 다문 조개껍질마다 말할 수 없이 어렵고 힘든 여인네들의 아픔과 한숨이 물려있기 때문이리라.

먹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맛이 독특하고 좋으니까 즐길 뿐이다. 그러나 그 조개 하나도 모진 풍파 속에서 어느 아낙의 손에 이끌려 나올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참고 견디어 왔을 것이다.

지금은 조개어장이 사라지고 성업 중이던 조개탕 집도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타지조개를 들여와 명맥을 유지하는 몇 집이 남아있긴하다. 신토불이라고나 할까, 이곳 생산조개가 아니어서 그런지 예전의 고유한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세태의 변화에 밀려 사라져간 것이 어찌 조개탕 뿐이랴만 인천의 명물 조개탕을 생각하면 옛 생각과 함께 그립고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손경옥 기자  press@inche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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