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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똥이야기] 해방이 되어도 인천 똥 문제는 심각이성진(인천 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인천지역 농가에서 경작기가 되면서 비료 기근 현상이 심각해 서울 시내의 똥오줌 수거 마차 820대 분을 확보해 농가에 배급하였다. 이전에는 중간 업자가 개입해 수익을 얻기 위해 비싸게 매각하였다. 경기도 보건후생부에서 직접 수거해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였다. 서울시는 이로 인해 똥오줌 처리 문제 해결 및 서울시 수입이 증가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졌다.(대중일보 1946.3.20)

겨울철이 되면서 인천시내 오물 청소가 원활하지 못해 생활 위생 및 청결 유지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특히 각 가정의 변소의 똥오줌을 수거하지 않아 악취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여름철이었으면 위생상 불결뿐만 아니라 전염병 발생의 온상이 될 위험성이 컸을 것이다. 인천시청 위생과 담당자는 인천 전 지역의 똥오줌 청소 작업 우마차가 5대만 동원되어 수거 및 처리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말만 하였다. 예산 문제로 우마차 5대로 인천시 65개동을 순회하며 똥오줌을 수거할 수밖에 없었다. 즉시 우마차 증차를 하지 않으면 65개 동 순번을 정해 1회 수거 및 처리하는 데는 5-6개월 소요된다고 하였다.(대중일보 1946.12.29.)

해방이 되면서 인천시 인구는 급증하였다. 중국 전재민과 월남 피난민이 대거 들어와서 인천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오줌 수거 및 처리가 제대로 이우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각 가정 변소마다 똥오줌이 쌓여 넘치는 바람에 악취와 청결문제로 민원이 가장 심했다. 이에 인천시에서는 예산 배정을 크게 늘렸지만 청소마차 15대, 인부 50명, 순시원 11명, 감독 3명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인천 전 시내를 5개 지구로 나누고 최대한 처리에 노력하였으나, 우마차는 크게 부족했고, 인부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렴한 인건비로 인해 이직률이 높았다. 그럼으로 해서 인천시 계획대로 똥오줌 수거 및 처리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였다.(대중일보 1947.2.22.)

실제 우마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의 똥오줌은 손구루마(손수레)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손구루마 바퀴와 폭이 우마차와 동일해서 개조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이 비용이 엄청 나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똥바가지로 똥오줌을 퍼 담고 똥항아리를 지게에 져서 우마차에 실어야만 하였다. 인부들은 달동네나 골목집 똥오줌 수거 처리를 기피했다. 좁은 골목 안에서 똥오줌을 퍼나르는 데 바닥에 흐르거나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달동네나 골목 전체가 악취가 진동했고, 파리까지 날아드는 등으로 민원이 많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욕은 욕대로 죽실나게 먹어요. 귀에 딱지가 지도록 욕을 얻어먹으니까 아마 수명이 길거라고 해요.”

그래서 인부들은 큰 음식점이나 부자집의 똥오줌 수거 및 처리 배정 받는 것을 부러워했다. 음식점의 경우는 똥오줌 수거를 손님이 많은 시간에 변소 수거 작업을 한다면 악취와 똥오줌 오물로 영업에 많은 지장을 주기 때문에 웃돈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야만 아침 일찍부터 변소 수거 및 마무리 청소 작업을 시작해 손님이 대거 몰려오는 점심식사 전까지 완료하였다. 부자집도 아침 일찍 수거하고 마무리 청소까지 하도록 인부에게 일정 웃돈을 주었다. 또 변소에 갔다가 귀중품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면 인부를 불러 똥오줌 처리하면서 귀중품을 찾도록 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비교적 많은 사례비를 지불하였다. 그러니 달동네나 골목동네의 똥오줌 수거 및 처리 작업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작업 구역을 배정하는 감독은 이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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