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1953.6.3, 인천공보

한국전쟁 직전에는 주간에 분뇨를 수거 처리하였다. 종전 직후부터는 분뇨 수거를 야간에 실시하였다. 주간에 분뇨를 실은 우마차가 시내를 다니는 것 지체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도시미관상 또 외국인에게 불쾌한 이미지를 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분뇨 수거 작업을 야간에만 실시하였다. 분뇨 수거 신청 가정에서는 황색기를 달아 놓으면 분뇨 수거 마차가 알아서 야간에 처리하였다. 인천시는 우마차 50대를 배차해 각 동마다 2일씩 분뇨 수거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인천시는 30만석 인분뇨를 저장 처리하는 탱크를 설치하였고, 펌프차 5대도 구입하였다.(인천공보 1953. 3.20., 1953.6.3.)

황색기 게양은 이승만 대통령이 분뇨는 야간에 한해서 운반하라는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다. 인천시는 인천시민들에게 황색기를 게양해야만 분뇨 수거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넘쳐 똥통으로 어찌할 바 모르고 쩔쩔 매고 있는 상황을 도외시한 행정 처리로 받아들여졌다. 분뇨 수거 작업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인천시민들은 우선 분뇨 수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피나는 헌신과 노력을 기대했다. 그러나 인천시의 결정에 어이없어 했다. 30만 인천시민의 분뇨를 원활하게 수거하고자 손구루마(수레) 70대를 새로 구입했다. 이는 우마차가 출입할 수 없는 동네 골목의 분뇨수거를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차륜의 폭이 우마차와 같아 골목 출입이 불가능했다. 손구루마를 다시 개조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결국 1953년 5월말에 시행하고자 했던 야간 분뇨 수거 처리계획은 6월 초부터 시행해야 하는 차질을 초래했다.

인천시는 인천경찰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농촌 우마차 100대를 매일 밤 동원해 해결하는 한편 우마차 조합을 조직해 청소사업소장이 조합장으로 지휘하도록 결정했다.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해야 하는 농촌 우마차 주인들은 매일 밤 분뇨수거를 해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제력도 없이 농촌 우마차 동원은 예상대로 실적이 미미했다. 그러면서 우마차조합도 유명무실했다.

분뇨수거 인부들은 직접 대면하는 인천시민들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으로 해서 분뇨수거 인부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그러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시민들한테 욕은 죽실나게 먹고, 귀에 딱지가 지도록 욕을 먹으니까 명이 길거라고 말하고 있지요.”(인천공보 1953. 9.9.)

분뇨수거 인부들은 하루 일당 80원으로 주간 작업 시 인부 2명이 겨우 2마차분 작업을 했는데, 도급제를 실시해 일 마차 당 80원씩으로 하니까 등잔을 들고 푸는 야간작업인데도 3마차 혹은 4마차까지 실적을 올리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나 우마차 수명이 1년 밖에 되지 않아 교체를 해야 하는데 예산부족으로 인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공 2명이 간단한 부속 교체할 뿐이었다. 분뇨 수거 인부와 직원들이 매일 철야 작업을 하는 까닭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인천시민들이 분뇨 수거비를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 분뇨수거에 필요한 기자재와 인부 인건비가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어 사기를 떨어뜨리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인천공보 1953.9.15)

특히 겨울철에는 똥통이 얼어 분뇨 수거 작업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눈이 오면 골목에 얼음이 얼어 분뇨 수거 작업 중 넘어져 분뇨가 땅바닥에 그대로 떨어지거나 이로 인해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작업 능률을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따라서 주간 수거작업을 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상부기관 절충한 끝에 황색기 게양과 야간 분뇨 수거 작업은 다시 주간 분뇨수거 작업으로 환원되었다.(인천공보 1953.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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