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래염전

지구상의 바닷물을 모두 증발시켜 소금을 만든다면, 그 무게는 무려 5경톤(5억톤의 억배)이나 된다. 이 소금을 육지위에 골고루 뿌려 꽉꽉 눌렀을 때 그 높이가 140미터가 된다니 얼마나 많은 양이 녹아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공기만큼 흔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을 보통 사람은 체액의 삼투압과 평형유지를 위해 하루에 14그램 정도 섭취해야 하고 먹는 외에도 음식물 보존과 의약품, 농․공업용으로 폭넓게 쓰이고 있어 약방의 감초 같은 촉매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조부께서는 더운 날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냉수를 담은 대접에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 몇 스푼을 타서 잡수시는데 갈증도 가시고 청량감도 있다고 하셨다. 요즘 음료처럼 달지 않고 자꾸 당기지도 않으면서 염분을 보충해 주는 지혜로운 음용수였던 것이다.

군생활을 하면서 하절기 야외훈련이나 행군 후 현기증과 무력감을 방지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먹던 소금 정제가 과학적 근거가 있었음을 어른들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수년전 캐나디언 로키를 여행할 때 컬럼비아 대빙원으로 향하는 '아이스 필드파크 하이웨이'는 전장 3백 킬로미터의 좌우로 웅대한 자연 속을 달리는데 곳곳에 야생의 산양이 무리지어 도로위의 염분을 핥아먹는 통에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산림 속에서 얻기 힘든 염분을 아스팔트길 위에서 섭취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생존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속도로를 넘나드는 절박한 행위에 딱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받도록 했고 충선왕 때 도염원(都鹽院)이 설치되어 나라의 전매품이 되었다.

▲ 염전창고

조선말인 1907년에 최초의 근대식 천일염전이 인천 주안에 만들어지고 이어 남동, 군자 등으로 확장해 나가 인천이 천일염전의 시발지가 되었고 소금의 명산지가 되어 인천 '짠물'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갖는 배경이 되었다.

짠물이라는 별칭은 주로 군대에서 통용되고 많이 들어왔지만 의미하는 뜻이 강단과 용기가 있고 소금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란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니 인천 사람의 시대정신으로 굳이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와 소금을 맞바꾸었고 관리나 군인들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하여 현물급여를 뜻하는 라틴어 '살라리움'이 어원이 되어 오늘날 봉급쟁이를 '샐러리맨'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오래전부터 그 가치를 인정해 온 것이 틀림없다.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독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주위에 소금을 뿌렸다. 우리도 문상을 다녀오면 대문 밖에서 옷 위에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있는데 아마 소독과 정화의 뜻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그만큼 소금은 살균, 소독, 진정 등 다양하게 쓰였으니 만능이라고나 할까. 어려서 배탈 났을 때 소금물을 먹여 구토하게 하거나 소금물을 흑갈색의 활명수 병에 담아 축농증 치료약이라고 콧구멍에 흘러들게 하던 고역도 약리적으로 효과가 있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고대인들은 소금이 불변의 힘이 있다 하여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 생각했으며 속담 중에도 소금과 콩을 나누어 먹는 사이를 세상에서 가장 친한 의미로 표현했고 소금 한 톨 주지 않는 사람을 인색함의 대명사로 일컫기도 했는데 구두쇠를 짠돌이라고 부르는 요즘 속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이지만 유년시절 이불에 오줌을 싸면 어머니는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오는 벌을 주셨는데 “또 쌌구나.” 하면서 한줌 퍼주시던 옆집 아주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식량이 귀해서 그랬는지 예방차원에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으나 왜 소금만 얻어오게 했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서에서도 소금의 맹세를 귀히 여겼으며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에서 “너희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처럼 소금의 역할을 확실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성 싶다.

지금 주안공단 자리에는 제1호부터 6호까지 커다란 염전저수가 있었는데 깊은 곳은 어른 키 한길 반 정도 되어 저수지에 놀러 갈 때는 항상 어머니께서 조심하기를 당부하며 노심초사하시던 생각이 난다.

여름에는 물놀이하는 수영장이고 혹한의 겨울에는 썰매장이 되어 온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다. 저수지와 바다 사이에는 제방이 축소되어 싸리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있어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수영할 때는 옷을 보관해두기도 하였다.

염밭에는 물레방아라고 부르던 수차가 뭉게구름 속에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돌고 있어 그림 같은 풍경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고 특히 소금 운반용 협궤 수레차를 치고 달리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던 상쾌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염전은 수분증발이 잘 되는 봄과 가을에 분주했고 여름에는 비 때문에 중도에 바닷물을 빼고 다시 넣기 일쑤였고 장마 때는 아예 휴업을 했는데 염분의 농도가 낮으면 소금결정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천일제염은 대개 열흘정도 햇빛에 졸여진 바닷물을 이 밭에서 다음 밭으로 이동시켜 최종적으로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밭에서 소금 결정을 맞게 되는데 주로 석양녘에 염부들이 가래로 긁어모아 원뿔 모양으로 쌓아 놓고 물기를 뺀 후 죽통에 담아 양어깨에 짊어지고 창고로 옮긴다.

▲ 염전창고

바닷물이 변하여 하얀 소금이 산을 이루고 그것이 쌀처럼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면 경이롭고 신비스럽던 생각이 난다.

재미난 것은 요즘 흔한 무좀이 바닷가에서 놀던 우리들이나 염부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고 일부러 사람들이 염전에다 발을 담그며 자연 치료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소년시절 온몸의 피부가 까맣게 타고 허물이 벗겨져 거칠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아토피니, 가렵다거나 피부발진 없이 지냈던 것을 보면 소금기 덕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당시 주안염전 뿐 아니라 인천을 끼고 있는 해안가에는 간석지가 많아 송림동, 가좌동, 남동염전, 연안부두 입구의 낙섬과 영종, 소래, 군자 등이 온통 대단위 소금밭이었고 전국 사용량의 반을 생산해 냈던 것이다.

지금은 염전의 용도가 바뀌어 공업단지와 택지개발로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인천의 천일염은 전국에서 알아주던 명산품이었다.

소금은 짠 맛이 특징이고 그것은 음식의 맛을 내는 기본이다. 많이 넣거나 조금 넣으면 어떤가? 짜거나 싱거워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된다. 그 비결은 절묘한 균형감에서 오는 것인데 맨밥에 적당히 가미하면 단맛이 나고 은근한 고소함도 지녔기 때문에 바닷가에서는 깨소금을 넣어 주먹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금의 종류도 점차 고운 소금, 흰 소금으로 정제하여 순도를 높여 팔려갔지만 고기나 생선 구울 때는 역시 개흙이 약간 묻은 듯한 굵은 소금을 훌훌 뿌리면서 즉석에서 구이를 해먹을 때가 원초적인 맛을 느끼게 된다. 소위 요즘말로 웰빙구이라고나 할까 역시 자연의 맛을 더해 주는 것 같다.

세상살이에 꼭 필요하며 변치 않는 불멸의 소금….

나는 세상에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이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나?

정녕 소금 같은 보물은 못되더라도 간수(苦鹽, 노수: 소금의 부산물로 두부 만들 때 콩물을 엉기게 하는 액으로 성분은 Mgcl과 Mgso4임)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요즘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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