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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길 작가의 '소래단상'
▲ 소래철교와 소래포구-사진출처 나무위키

책상위에 낯설지 않은 제호의 『소래나루』한 권이 놓여있었다. 표지 배경이 입항하는 어선을 담고 있어 시원스럽고 제법 두툼한 것이 기대감을 갖게 한다.

책장을 넘기니 예기치 않게 찾아온 소래손님은 그 동안 접고 있던 갖가지 상념과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소래는 행정구역상 인천에 속해있고 갯고랑 건너편은 경기도 시흥시로서 일제시대에 부설한 수인선 철교가 놓여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시흥시 월곶이나 군자 쪽으로 갈 때는 부천 쪽으로 돌아다니기가 멀어 철교 위를 건너 다녔다. 6․25때는 많은 사람들의 남행피난길목으로 애환이 서린 곳이다.

1960년대 후반 소래는 시흥시 포리에서 오이도까지 뱀처럼 구불구불한 20여 킬로미터의 물길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갯골을 따라 돛단배가 오르내리던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10여척의 풍선과 전마선이 꽃게나 새우, 조개잡이를 하며 시내에서 오는 하루 대여섯 차례의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오지였다.

그러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싱싱하고 값싼 꽃게와 젓새우를 구입 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더불어 어선과 장비의 현대화로 동력어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1980년 초에 이미 250여척에 달했고 하루 안에 덕적도 앞바다까지 나가 생선을 잡아올 수 있게 발전하였다.

선착장과 물양장, 위판장과 판매시설이 속속 만들어지고 횟집과 상인들이 모여들어 주민이 2만여 명을 넘어서는 수도권 제일의 포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소래와 더불어 철길 건너 시흥 쪽도 경쟁이나 하듯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포구로 들어오는 갯골은 꼬불꼬불 숨바꼭질 하듯 길다. 한때는 간첩이 잠수정을 타고 침투하여 군검문소가 들어서고 야간 운행이 금지되는 안보취약지역으로 관리되기도 했었다. 근년에는 포구 축제가 알려지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미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에 관광어촌으로 튼튼한 기반을 확보한 셈이다.

어린 시절 선친을 따라 지금은 없어진 수인선 협궤 열차를 타고 소래역이나 군자역에 내려 갯벌에 들어선다. 썰물을 따라 망둥어 낚시를 하다 밀물에 돌아오는 길은 힘들지만 재미도 있었다. 기차는 조그마한데다 느리긴 해도 창밖으로 아름다운 시골풍경이 펼쳐져 여행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어떤 때 군자역에서 기차를 놓치거나 연착을 할 때는 철길을 따라 소래까지 걸어오며 다리를 건넌다. 철로의 침목을 밟고 또 밟으며 하나, 둘 세며 간다.

해가 서해바다로 붉게 숨어들 무렵엔 발바닥이 아파 철로 옆으로 난 실같이 좁은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다리도 아프고 배는 고픈데 철길은 끝이 없고 땀에 범벅되어 힘들게 걷던 생각….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노을이 물든 바닷가에 서면 그 시절 순수함에 젖어들 때가 있다.

한때 조그만 배를 운영하며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두주불사의 K선배와 L형, 거나해지면 한참 유행하던 󰡐하얀 손을 흔들며 귓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이라는 노래를 바이브레이션도 근사하게 부르던 B형 등 잊을 수 없는 터주 대감들도 생각난다.

대문 열린 아무 집이나 들어가 빨래줄에 매달린 생선을 구워 막걸리를 먹어도 누가 왔다 갔구먼 하던 허술하면서도 인심이 후하던 곳이다. 언젠가 늦은 밤 텅 빈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오며 빵떡모자에 후즐근한 청색 유니폼의 차장아가씨는 졸고 있었다. 대취한 J형은 급한 나머지 실례(?)를 하여 출입문에 장마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일도 생각난다.

한편 한국화약측의 매립으로 인한 소래지역 어민의 수개월에 걸친 집단 시위와 농성, 그로 인한 갈등과 반목은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있다.

시청 앞 광장과 서울 여의도의 모정당 사무실을 점거하고 포구에는 붉은 현수막과 푸른 강성 구호들이 나부낀다. 상반된 이해관계로 친척, 동기간에도 질시의 골은 깊어만 가고 외부 세력에 의해 잘 훈련된 구호와 노래 합창은 일사불란하기만 했다.

뙤약볕 아래 시위하는 수백 명의 어민 집단속 부녀자들에게 일사병 방지약과 두통약을 나누어 주기도 하며 대화와 설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찬성하면 다른 한편은󰡐물먹었다󰡑는 등 무조건적 반대 때문에 구심점을 찾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의 심정을 빛이 바랜 업무일지 속에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진정, 탄원서, 기록정리, 검토 보고 자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미로(迷路)를 헤매 듯 끝없는 길을 걷는 마음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인지, 서로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매립은 뭐며 환경오염은 또 무엇인가?

흥분한 다수는 과연 이성적일까?

그래도 일말(一抹)의 양심을 가지고 처신해야 할 텐데.

저녁에는 서울 모처의 집단 시위장소에 가봐야 한다.

계속된 수면 부족이 늦은 오후를 상념 속에 침잠(沈潛)케 한다.

바다가 사라지는 현실 앞에서 부메랑효과가 닥쳐오리라는 아픔에 견딜 수가 없다.󰡑

보상협의가 마무리 될 즈음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압도당한 듯 아픈 마음을 이렇게 토로한 때도 있었다.

'수개월에 걸친 이전투구(泥田鬪狗)는 끝나다. 비릿한 내음, 광활한 흑갈색의 간석지, 썰물(ebb tide)이 시작되는 오후, 공허한 마음뿐이다.

현실은 이곳을 파먹고 사는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정말이지 마음을 비워줘야 한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해의 용왕님 한눈팔지 말고 제발 관할구역 뺏기지 마시오. 우리 같이 삽시다.'

내가 진작부터 생각해왔던 동경의 바다, 미지(未知)의 바다는 이렇게 하나, 둘씩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얼마 전 동우회 모임을 따라 오랜만에 찾은 소래….

저 멀리 바다가 매립되어 산천이 변했고 사람도 가고 없는데 소금차 레일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말라버린 침목엔 세월의 두께만 쌓여 가고 있었다.

추억과 낭만, 그리고 지나간 얘기들은 철지난 몇 송이 갈대꽃에 휩쓸려 바람에 흔들리는데 고층아파트와 모텔, 횟집의 상혼이 눈을 번뜩이며 들어오라 부른다.

도회지 같이 활기찬 어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저 멀리 몇 척의 배들이 통통거리며 들어오고 있다.

아마 입항할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편집부  press@inche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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