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봉도 전경

지리한 우기의 끝자락. 간간히 햇살이 비추던 8월초. 승봉도를 찾았다. 여름바다란 옅은 구름이 끼어야 제격이라는 믿음도 잠시, 안개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바다는 온통 회색빛이지만 던져주는 새우깡을 쫓아 선회하는 갈매기 떼와 얼굴에 와 닿는 촉촉한 안개비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푸근해진다.

승봉도에 내리니 어촌계장인 황 선생이 반갑게 다가서며 민박집인 이장 댁으로 안내한다. 이층 방에 여장을 풀고 부엌을 보니 이동식 가스레인지와 조리기구 등이 가지런하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와 상추 그리고 가지고간 밑반찬을 펼치니 소박하지만 근사한 점심상이 차려졌다.

오후가 되니 구름이 벗겨지고 햇볕이 뜨겁다. 5분 거리에 있는 이일레 해수욕장을 가보았다. 고운 모래와 완만한 경사 위로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간다. 1킬로미터 쯤 되는 백사장에는 10여 명의 해수욕객뿐, 한산하기 그지없다. 혼잡한 도로와 차량들과 콩나물시루 같은 해수욕장, 원색의 파라솔 아래 엄두가 나지 않던 육지의 피서지와는 별천지의 모습이다.

산 위로는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삼림욕장이 잘 조성되어 있고 침엽수림이 쭉쭉 뻗어 있어 뿜어 나오는 수향(樹香)이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하다. 산행까지 할 수 있다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입구에는 섬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서있다. 370여 년 전 신 씨와 황 씨 성을 가진 어부가 피항왔다가 눌러 살게 되면서 ‘신황도’로 불리다가 섬의 형상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하여 승봉도(昇鳳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석양빛이 물드는 저녁, 낚싯배에서 건져온 농어로 회를 뜨고 맑은 탕을 끓인다. 한창 살이 오른 희고 탱탱한 회 한 점, 한 점마다 연한 무지갯빛이 감돌고 기름이 동동 뜨는 백숙 탕은 시원한 것이 진미 중에 진미였다.

밤이 되자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며 몇 명의 사내들이 한 바구니씩 되는 다시마를 가져와 빨랫줄과 난간에 널어놓는다. 썰물에 맞추어 바위에 붙어있는 다시마를 따왔다는데 신선한 해조내음이 사방에 퍼졌다.

이튿날, 김밥 두 덩이와 음료수를 가지고 어장관리선에 올랐다. 황 계장이 운전하는 0.5톤짜리 전마선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간다.

10여 분 거리의 무인도인 사승봉도에 가는 길이다. 사도(沙島)라고도 하는 이 섬은 바다 한가운데 암초가 드러나는 광활한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것이 압권이었다.

모래 해변에 우리 둘을 내려놓고 황 계장은 뱃머리를 돌렸다.

그래 이제부터 자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의 향유여! 작렬하는 태양, 끝없이 펼쳐진 모래벌판과 물새들의 울음, 반짝이는 물결, 수평선 위로 실려 오는 해조음, 오직 원시자연만이 거기 있을 뿐이다.

십리 이상 드러난 물결 모양의 모래톱과 사구(砂丘)가 별천지에 온 느낌이다. 1박 2일의 은○○ 가수가 촬영했다는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끝없는 벌판을 향해 걸어간다.

‘로빈슨 크루소’도 이런 곳에서 모험을 했었나. 김추자 가수가 ‘무인도’ 노래를 이곳에서 불렀다면 더욱 실감이 났을 텐데….

저 멀리 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돌아보니 아득하다.

돌아오는 길에 ‘풀등’으로 배를 돌렸다. 모래섬인 풀등은 썰물이 되면 사승봉도와 소이작도 근해까지 약 30만 평에 걸쳐 나타나는 거대한 모래벌판이다.

마치 해신(海神)의 마술쇼를 보듯 밀물이 되면 흔적 없이 바다가 되어버리는 모래벌판을 이곳 사람들은 ‘풀치’라고 부른다. 시간에 쫓겨 배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신비하고 기묘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할 수밖에….

어패류의 산란장으로 관광체험의 산 교육장으로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바다 모래 채취가 이곳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니 다행스럽다.

황 계장의 호의로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들어가잔다. 반시간 정도 걸린 듯 조그마한 섬이다. 야트막한 산과 울창한 수림, 기암괴석인 병풍바위와 촛대, 삼형제. 부채바위가 늘어서 있고 바닷속에는 다시마가 무성하여 싱싱한 내음이 휘감아 돈다.

다시마를 먹이로 하는 전복과 해삼. 키조개가 자라고 낙지와 바지락을 캐는 아낙들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육지에서 가까운 이곳에 짙고 푸른 청정바다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간 여러 섬을 다녀봤지만 승봉도는 그 부속 섬을 포함하여 때 묻지 않은 신비로움을 간직한 보물섬 같다.

한해 쌀농사로 70가구 200여 명의 섬주민이 십년을 먹을 수 있어, 상대적으로 어업에 관심이 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다에서 버는 수입이 훨씬 높아져 눈을 돌리기 시작했단다. 마을 어귀마다 삼삼오오 앉은 아낙들이 바지락조개 까기에 여념이 없다. 깐 조개는 냉동하여 육지에 내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게 팔기도 하는데 그 수입이 짭짤하다고 했다.

유일하게 큰 건물인 초등학교 분교는 전교생이 세 명인데 모두 자가발전 하는 한전직원의 자녀라고 한다. 전기는 바다 건너 이작도 까지 송전하는데 생활이 점차 편리해 지기는 해도 젊은이들이 섬을 떠나는 것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평상에 누워 별을 헤는데 황 계장이 전복 몇 개와 ‘가이바시’라고 부르는 키조개 패주(貝柱)와 해삼 네 마리를 가져왔다. 갓 잡은 것들이라 싱싱하고 딱딱하여 씹기가 불편하지만 씹을수록 짭조름한 단맛이 배어 나온다. 오호라, 이런 때는 바로 소주. 맑은 소주를 곁들이면 기가 막힌 것을…. 늦은 밤, 가스등 아래 호사를 누린다.

돌아오는 날, 아침부터 비가 쏟아진다.

뱃터 긴 의자에 앉아 상념에 젖어있는데 옆자리 노인께서 말을 걸어온다. 길 건너 포장집에서 한 양재기에 오백 원 하는 막걸리를 자신 듯 불콰한 모습이다.

평북 곽산이 고향이라는 팔순 노인께서는 열아홉 나던 오산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트럭에 실려 의용군에 끌려간 후 파란만장했던 과거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세 나라 군대(인민군, 유엔군, 국군)를 거치게 된 기구한 운명과 61년 전 마지막 뵙고 온 어머니 얘기를 하며 이슬이 맺힌다. 고향에 한번 가보고 죽는 것이 평생소원 이라는데 풀어 드릴 수는 없는 것일까.

아들 가족과 휴가를 왔다 간다며 손자의 부름에 이야기는 그쳤지만 이 비극은 언제 그칠 것인가?

비에 젖은 뱃터, 저 멀리 회색빛 바다 위로 여객선이 들어온다. 왠지 목이 컬컬해지며 막걸리 한잔이 생각난다.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