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호의 짧은 소설

<공수 무당의 입을 빌려 신이 인간에게 의사를 전하는 일>

4. 물구나무서기 좋은 날들

“높고 귀한 존재가 자식 인연으로 와서 돕고 있구먼. 말라비틀어지다가 ‘바스락’ 떨어졌을 자네 명줄 살찌워놓고 늘려놨는데,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한단 말인가. (부채를 다시 쫙 펼치더니 얼굴을 가리고 방울을 ‘차르르륵’ 흔든다. 이내) 자식 덕분에 책 내고 비행기 타고 다니며 연단에 설 날 멀지 않았네. 복 자랑 그만하시고. (부채를 ‘탁’ 접으며) 어서 일어나시게.”

중증 발달장애인 31살 나의 아들 현수는 오늘 새벽에도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잠들어 있다가 발견됐다. 5시가 채 못 된 새벽 시각에 울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익숙하게 웃옷을 걸쳐 입고 파출소로 달려가 보름달처럼 웃고 있는 현수를 데려왔다.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이다. 주기를 좁혀가며 벌어지는 참담한 상황을 수습하며 나는 실망감과 절망감 아니, 실패감에 치를 떨었다. 나락으로 치닫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도망치듯 달려온 무당집이었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런데 저 무당은 한술 더 떠 달나라 토끼 나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망한 무당이 자식이 장애인이라고 나까지 깔보고 장난질을 하나’ 싶어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현수는 최근 자립이 필요한 장애인에게 지원되는 임대주택 입주 신청에서 당첨(?)돼 지난달에 입주를 마쳤다. 현수와 떨어져 각기 다른 집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그것은 그냥 일종의 ‘꿈’ 같은 거였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등 장애인 지원정책을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오기는 했지만, 막상 실질적인 현수의 자립을 현실로 앞두고는 머리가 띵했다.

걱정이 앞서고 두려움은 뒤를 쫓았지만 남편과 나는 ‘지난 30여 년, 길거리에서 날밤을 새우고 삭발을 해가며 얻은 전쟁 전리품’인 양 귀하게 얻은 현수의 자립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며 우리는 현수의 자립을 도왔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썩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상을 한번 믿어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현수가 이사한 집은 지역사회에서 지원해주는, 개별세대가 독립된 원룸형 임대주택이었다. 개인 부담금은 월 8만 원으로 시세에 비해 매우 저렴한 편이어도 31살 청년이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 없는 공간이었다.

이사를 마치고도 나는 떠나지 못한 채로 현수가 잠이 들 때까지 종종대고 있었다. 영상 도어락과 스마트 전등 버튼 사용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숙지시켰고, 하루 루틴을 순서대로 적어놓은 커다란 종이를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순서대로 하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중증발달장애인이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알았고, 이해력이 부족했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시어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두 달만 잘 적응해낸다면 아들의 완전한 자립 또한 가능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막상 마음을 정하고 시작해보니 묻어두었던 젖은 날개를 찾은 것도 같고 잃은 것도 같은 ‘희망’이 교차하면서 가슴은 내내 두서없이 뛰놀았다.

처음 사나흘은 현수가 잠든 것을 재차 확인하고 돌아왔음에도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벌떡 일어나 현수가 잘 있는지 가봐야 한다고 남편을 보채기도 하고, 심지어 말리는 남편을 때리기도 했다.

현수는 그러한 우리의 소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길고 위태했던 밤들을 무사히 건넜다. 다음날이면 성인 발달장애인들의 지속가능한 일자리제공을 위한 ○○사회적협동조합 고체비누 제작소 자신의 자리에 멀쩡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의 안위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오랜 지병인 관절염으로 곧 부서져 사라졌으면 좋을 것만 같은 통증을 부여잡고 손가락마다 파스를 갈아 붙이고 약을 찾아 입속으로 쏟아 넣었다. 그리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현수가 공원 잔디밭에서 자다가 처음 발견된 것은 자립하고 6일째 되던 날 새벽 4시께였다. 현수가 발견된 공원은 현수에게는 ‘솜사탕’이라고 각인된 곳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아무리 공원의 이름을 다시 알려줘도 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솜사탕’이라고 주장했다. 현수가 아주 어릴 때, 그곳에 상주하던 자전거솜사탕 할아버지가 있었다. 현수를 보면 돈도 안 받고 분홍색 구름 솜사탕을 크게 만들어서는 현수의 손에 쥐여주며 “그놈, 참 잘 생겼다.”라고 말해주던 할아버지였다.

현수는 그 공원 잔디밭 한중간에서 잠들어 있다가 이른 새벽 산보에 나선 어르신에 의해 발견됐다. 현수와의 분리불안 증세가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사건접수를 하고 돌봄 지원자원봉사자의 말과 건물 내·외부 CCTV까지 일일이 다 확인해보았지만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거긴 대체 왜 간 거니?”라는 질문에 현수는 입을 동그랗게 하고 ‘하아’ 웃기만 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다잡으며 현수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3월인데도 바람이 시려서 입술이 덜덜 떨렸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데, 현수와 나에게는 그러한 기본적인 순리조차도 비껴갔다. 겨울을 버티고 나면 다시 겨울이 왔고, 그 겨울을 다시 또 버티고 나면 어김없이 또다시 겨울이었다. 차려놓은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주잔만 기울이던 남편이 내뱉는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탄식은 나를 더욱 곤두서게 했다. 현수가 공원 잔디밭에서 잠드는 상황은 주기를 좁혀가며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워 파출소 밖까지 배웅을 해주며 건네는 경찰공무원들의 판에 박힌 위로의 말들도 거슬리고 역겨웠다.

파출소에서 데리고 온 현수를 따뜻한 물로 대충 씻기고, 햄을 구워 밥을 먹이면서도 나는 현수에게 여러 대를 맞았다. 일하러 조합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현수에게 내가 쓰는 휴대폰을 내밀었더니, 신이 나서 그것을 눈에 집어넣을 듯 두 손으로 받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현수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수는 내 휴대폰 냄새를 맡고 볼에 대보고 안아도 보다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색 바랜 밍크 이불을 뒤집어쓰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현수가 만지고 노는 시간들을 망연자실 지켜보았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일어나서 현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든 현수의 몸을 바로 눕히고 현수가 두 손으로 고이 감싸 쥐고 있는 나의 휴대폰을 빼내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불을 바르게 덮어주었다. 푸른 실핏줄이 보일 만큼 얇고 하얀 피부에 오독한 콧날 그리고 일자로 다문 입 매무새까지. 나는 잠든 현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감긴 눈꺼풀 속으로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수면 5단계인 렘(REM)수면 단계에 이른 것이다. 나는 천천히 베개를 집어 들었다. 현수의 얼굴에 갖다 대고 6분만 참으면 된다. 딱 6분만 참으면 봄날 위로 날아오를 수도 있을 거야. 현수야. 너도나도 어쩌면 그곳으로 갈 수 있단다. 현수의 길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이 참 오만해. 자네처럼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은 더 많이 오만하단 말이지. 우주가 얼마만 한 것 같은가. 설마 이 작은 지구별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부처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 것 같은가. 각설하고. 장난감 같은 이 작은 세상에서 자네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또 장애를 갖고 있다고 자네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했단 말인가.”

복채로 돈 5만 원을 올려놓고 휘적휘적 무당집을 나와 일터이기도 하고 쉼터이기도 한 ‘동그라미’ 센터로 돌아왔다. ‘동그라미’ 센터는 4년 전 지역 내에서 함께 활동하던 같은 처지의 부모들이 의기투합해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장애인을 위한 작은 쉼터 공간이다. 무당의 말과 현수를 낳고 키운 지난 30여 년의 삶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센터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내내 뒤숭숭했다.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중증발달장애인 아들 현수를 두었다고, 그래서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의 청장년 30년 전부가 현수를 돌보느라고 희생됐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리어 아들 현수야말로 저 위에 범접도 못 할 높은 차원에 계셨던 존재로서 나의 명줄을 늘리고 나의 보람찬 성장을 돕기 위해 이 우스꽝스러운 지구별에 내려와 희생 중이라니.

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온 나는 작가가 꿈이었다. 정확하게는 시나리오작가였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시나리오를 쓰고 지우고 욕하면서 누비고 다녔던 충무로에서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연애했다. 29살 되던 봄에 남편에게 “아홉수를 결혼하는 거로 액땜하려고 해. 도와줄 거지?”라고 청혼했다. 남편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이듬해 현수를 출산했다. 나는 얼떨결에 엄마가 됐지만 누구의 엄마보다는 작가로서 나의 이름 석 자를 드높이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했다. 아니, 절박했다. 현수를 친정모친에게 떠맡겨놓다시피 하고 나는 이리저리 휩쓸리며 충무로 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현수를 돌봐주던 모친이 여러 번 현수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현수는 보름달처럼 잘 웃는 순한 아기였고, 특히나 엄마인 나를 볼 때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팔을 버둥거리면서 웃어주던 기특한 아기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엎어졌고, 나는 나대로 깨져갔다. 우리가 내놓은 충무로에서의 결과물은 참담했다. 3억이 넘는 빚과 현수의 발달장애 확정 소식이 그것이었다. 하늘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지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는 해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나는 술에 취해 어린애처럼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남편이 내민 손을 잡고 갈기갈기 찢겨져 너덜해진 꿈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본격적인 생활전선에 뛰어들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하자. 남편은 중학교 동창이 알선해주었다는 햄버거 유통업체 영업팀에 취직했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현수에게 매달렸다. 현수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발달장애아 박사과정 논문을 써도 될 만큼 공부를 했고, 관련 단체들을 쫓아다니며 간담회며 토론회 패널로 참여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어느새 작가가 아니라 투사가 돼 있었다. 머리에는 자주 띠를 둘렀고 때에 따라 삭발까지 단행하면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과 지원을 요구했다. 발달장애인이 성인이 돼서도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자리(갈 곳)를 제공하고, 부모의 과중한 돌봄 부담 또한 사회가 나눠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내가 현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현수를 위한 참사랑이라고 믿었다.

“나는 정말로 현수를 사랑했을까.”

사랑은 손잡고 함께 가고 싶은 것이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다 안다. 사랑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현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매 순간 현수와 분리되기를 희망했으니까. 또한 그것을 세상에 요구하느라 날마다 분주했으니까. 현수와 함께 했던 수많은 나날들 중 아무리 꼽아보아도 현수의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싶어 애가 닳았던 날은 기억에 없었다.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은 현수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현수는 언제나 도망치고 있는 엄마를 지켜봤을 것이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새털처럼 많았던 날들 내내 현수가 본 것은 ‘도망치고 있는’ 엄마였다.

남편은 나의 고집을 꺾기 위해 여러 날 나를 설득했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여 준 그는 어깨를 흔들며 오래 울었다. 우리는 전세금을 빼서 캠핑카를 장만했다. 현수와 나를 위해 지상이 준비해준 선물이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나의 아들 현수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현수의 손을 놓기 위해 애쓰는 대신 더 굳세게 잡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렇게 굳세게 잡은 손을 힘껏 흔들면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보고 누린 세상을 담아낸 눈동자를 원 없이 공유할 것이다. 남편이 혼자 지낼 오피스텔 건물 담벼락에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당도한 봄이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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