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6월 항쟁; 저항적 에로스와 정치적 상상력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유럽에서 1848년은 혁명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보수 왕정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브뤼셀에서 ‘공산당선언’을 집필하던 맑스가 혁명의 열기를 쫓아 파리로 달려갔던 해도 바로 그때다. 시민들은 자유(freedom)와 진보(progress)를 열망했고, 일단의 사람들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평등한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1968년 유럽은 또 다시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변혁의 물결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과 미국, 일본으로까지 퍼져갔다.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어지면서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강한 저항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반전(antiwar)과 반문화(counterculture), 평등(equality)과 해방(liberation)의 기치가 내걸렸다.

1848년 혁명과 1968년 혁명이 갖는 고유한 의미의 하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새로운 가치와 이념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데 있다. 이 두 혁명에서는 억압과 착취 같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 인권, 문화적 해방, 반차별, 사람사는 세상과 인간다운 삶이 요구됐고, 그 이념들은 혁명 이전의 세상과 혁명 이후의 세상을 확연하게 나눠놓는 기준이 됐다. 미국의 사회학자 임마누엘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이제껏 세계적 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술회했다.

또 다른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는 1968년을 놓고 “인류가 처음으로 자기의식을 펼친 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68혁명의 출발점은 정치적 에로스와 상상력이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제자이기도 한 그의 68혁명에 대한 논평은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와 그에 대한 자각”이라는 스승의 견해와 궤를 같이 한다. 카치아피카스가 말하는 혁명의 시발은 이성(理性)에 기반한 정치적 판단이기 보다는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감성에 기반한 에로스(eros)적인 저항이다.

1987년 6월 10일 국민대회에서 비롯된 대규모 집회는 이내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고, 학생과 노동자, 샐러리맨과 도시 중산층까지 가세한 수백만의 민중(民衆)이 연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20일간 계속된 이 에로스적인 저항을 통해서 시민들은 승리했고 폭압적이었던 독재정권은 마침내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는 ‘6월 항쟁’은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

‘6월 항쟁’을 통해서 시민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를 분출했고, 한국사회에서 그 결과는 단순한 정치적 구조변화 그 이상의 변화들을 잉태했다. 물리력에 기반했던 파쇼적 권위주의는 약화되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 영역을 넘어 경제정의에 대한 요구로,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요구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6월 항쟁’을 통해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보다 민주화가 더 시급한 당면과제였던 그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로 확연하게 나뉘어졌다.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사회 전면에 나서 역사의 방향을 변화시켜가는 ‘에로스 효과’는 1848년 혁명이나 1968년 혁명에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1987년 한국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현상이었지만, 세계를 뒤흔들었던 두 번의 혁명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월러스틴의 겸허한 술회와 달리 가치와 이념에 있어서 거대한 전환을 만들어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현대사를 뒤흔들었던 ‘6월 항쟁’이 이후 우리사회의 이념지형에 어떠한 전환을 만들어내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6월 항쟁’의 성패를 평가하는 한 지표가 될 것이다.

억압적인 것, 권위적인 것,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것, 파쇼적이고 폭력적인 것, 야만적인 것,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것,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 형평에 어긋나고 특권적인 것,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것... 이런 것들에 대한 에로스적인 저항, 그리고 가치적이고 이념적인 판단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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