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정치산

 

살짝 눈 흘기며 눈물 흘리는 걸 보았지
살랑살랑 보일락 말락 살짝살짝 내비치며
살그머니 유혹하며 살랑대는 것도 보았어
감쪽같이 숨겨 놓고 폭폭 안기는 것도,
빛나는 아홉 개의 표정은 들키지 않았어
호리병 속에서 몽글몽글 안개 피우며
살짝살짝 눈짓 보내고 있는 것도
그 눈짓, 그 몸짓, 눈치 채지 못했어
간도 쓸개도 다 빼가는 걸
다 녹아내리는 걸 눈치 채지 못했어
번개 치면 후다닥 번쩍 정신 차리고
깜찍하게, 해맑게, 천진한 얼굴로
그냥,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 거야
후드득, 잠깐 그의 가슴에 실종된 빗방울이잖아
그냥 잠깐 적시고 지나간 거잖아?
해가 환해지잖아, 한 눈 찡긋 감고 느껴봐
바람이 부는 대로 그냥, 그냥, 지나갈 거야
잠깐이잖아, 아주 잠깐, 아주아주 잠깐이잖아.                   

 

 

여우비는 맑은 날에 잠깐 내리는 비이다. 이 비는 대기 높은 곳에서 강한 돌풍이 몰아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로는 여우를 사랑한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서 우는 비라고도 하고, 구미호가 슬퍼서 우는 눈물이라고도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슴에 때 아닌 돌풍이 일어, 사랑의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여우에게 홀린 듯 간도 쓸개도 다 빼는 게 사랑이다. 여우비 그치면 ‘내가 그때 돌았었나 봐’자책하기도 하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담담하다. 여우비 닮은 사랑도 후유증은 있게 마련이다. 너무 아픈 나머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대인 기피증에 걸려 두문불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리병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생명력이다. 모른 척 실종되는 시인의 자기위로적 사랑법이 아프다./글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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