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仲秋
 
 
온 동네 달아오른다
멱살 놓친 손 끝
따라가다 얼굴이 노래지고
핏줄 터진 어둠이 골목마다 붉어지면
주먹질은 서걱서걱 바람을 가르고
헐렁한 소맷자락 너울너울 춤을 추어도
두 뺨 멍든 채로 발 동동 구르고
나 살려 외치다가
목청 낮추어 중얼중얼 대는 소리
갈바람이 구르는 소리
지랄지랄지랄

 

나는, 짐승
 
 
매의 눈이다. 세세한 움직임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보는 다초점렌즈, 마른 가지 끝에 앉은 눈동자가 이글거린다.
쫓고 쫓기는 고속도로다. 수도 없는 불빛들이 매의 눈동자처럼 빛을 내며 어둠을 지킨다. 힘차게 내리꽂히는 눈, 동자 속으로 토끼가 풀을 뜯는다. 순식간에 심장이 뜯긴 토끼가 멀쩡해져 다시 풀을 뜯는 초원의 목초지, 전광판이라는 이름으로 피로 얼룩진 매의 얼굴을 비춘다.
부리마다 피가 흥건한 저 얼굴, 저 눈
앞발로 할딱거리는 토끼를 또 밟고
목을 물어뜯으며 가슴팍의 살점을 후비며
언제부터 너도 나도 짐승, 눈을 부릅뜬다.
 
 
 
     메밀꽃 필 무렵, 그 후
 
 
아이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함박웃음 짓는 아이들이지요. 당신은 달빛이 남실대는 개울에서 나귀를 잡던 그 손으로 슬그머니 잡아당겼지요. 저도 모르게 당기는 핏줄, 달빛 아래 메밀꽃 소금 뿌린 듯 하얗게 흐드러졌지요. 물레방앗간 방아소리에 끌려오는 장돌뱅이의 전설은 오늘도 바람 따라 떠돌고, 꽃들은 달빛이 흐르는 밤이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얗게 질린다지요. 청초한 그녀와의 여름밤, 메밀꽃 옆 물레방앗간, 달빛이 남실대는 개울, 긴긴 날 흐벅지게 핀 메밀꽃밭에 서서 스무 해 스무 날 하냥 기다린다지요.
 

 

정령시인이 두 번째 시집 ‘크크라는 갑 ’을  출간했다. 

2014년 리토피아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연꽃 홍수'가 있으며, 부천 문협과 막비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원이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생명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시작을 생각할 것이고, 종교론자들은 자기 종교의 위대성을 밝히려 들 것이다. 그러면 시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최소한 정령 시인이 본질주의자가 아니고 동시에 손쉬운 관념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시집에서 생각하게 되는 기원은 실상 시작/출발점beginning에 가깝다.이번 시집에서 정령 시인의 시적 수법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시적 알레고리를 만드는 솜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사적 알레고리, 즉 일반적인 수사적 우화fable의 의미를 벗어나서 현대시의 알레고리는 작품 표면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를 대체한다는 점 외에 거의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훈성이나 정형화된 진실에 대한 수긍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구비전승의 여러 이야기들, 가령 신화나 전설, 민담 등을 소재로 차용하여 시적 형상화를 꾀할 때도 마찬가지로 원原 소재에 구애됨이 없이 활달하다는 특징을 드러낸다./백인덕(시인)의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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