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히리 시인

박하리 시인의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이 리토피아에서 출간됐다.

등단 이후 5년만의 첫 시집이다. 그 동안 전국 문예지에 발표해온 68편의 시를 한데 모으며, 시인은 ‘시인의 말’에 ‘그 어느 날, 그 하루, 바로 오늘. 살아 있어 고맙다. 풀씨 하나 호로록 날아와 꽃이 핀다.’라고 적었다. 수십 년 자영업을 해오면서 겪어온 수많은 갈등과 최근 여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처연하게 담겨 있다.

박하리 시인은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했으며, 전국계간지작품상을 수상했다. 계간 리토피아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막비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설을 맡은 백인덕 시인은 ‘박하리 시인은 무엇보다도 상황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다. 그가 맡고 있는 소임의 탓도 있겠지만, 직관과 감각의 차원에서 자신의 언어 능력을 끌어올리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언어 능력이란 결국 시어의 차용과 조어(造語) 방식에서 드러난다.’라고 평하여 시인의의 시를 향한 끈질긴 노력과 겸허한 태도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서검도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시작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사납게 울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서검도

―북방한계선

 

선을 그어 바다를 갈라놓았다

쓸리고 밀리어 떠내려 온 조개들,

오고가는 숭어 떼들 국적이 따로 없다.

 

하늘은 구름이 갈라놓았다

새들에게는 갈라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오고가는 하늘이다 새들도 국적이 없다

 

땅에도 선을 그어 갈라놓았다 

살금살금 옮겨다니는 쥐들, 스르르 선을 넘나드는 뱀들

개미들은 선을 넘나들고 집도 짓는다

온통 내 땅이다

 

풀씨 하나 바람에 몸을 싣고 선을 넘는다.

국적이 바뀐다.

 

갯벌

 

갯벌 위로 짱뚱어가 고개를 들고, 툭 튀어나온 눈이 갯벌을 사냥한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는 게들의 움직임은 순간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갯벌의 두둑한 둔부는 게들의 집이자 조개들의 안식처이고 낙지들에게는 피난처이다.

손바닥만 한 백합조개는 갯벌 속에서 속살을 뽀얗게 내보이고 있다. 갯지렁이가 속도를 내어 지나간다.

 

보드라운 갯벌이 발가락 사이로 속살을 내어준다.

하루에 두 번은 들고 나는 갯벌의 속살은 다주고도 모자라는 어미의 가슴이다.

짱뚱어의 날갯짓에 뻘 위에 널려진 고동에서 소리가 난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있는 소라는 짝짓기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짱둥어는 눈을 감아준다.

갯벌의 끝은 섬이고 바다이다.

 

길 위에 널린 말들

 

말들이 집을 짓고 길을 만든다.

말들이 나무를 심고 새를 키운다.

말들은 토담이 되고 토담 속의 동화가 되고 동화 속의 별이 된다.

 

혀끝에 뱅뱅 돌아 나오는 말들은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기도 하고,

혀끝을 바람처럼 벗어난 말들은 낙엽 되어 구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말들은 귓볼을 스쳐가는 바람이다.

잔잔한 술잔 속의 태풍이다.

 

말들은 토담 속의 아름다운 꿈이다.

고요한 꿈속의 한바탕 회오리다.

 

말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흔들린다.

풀잎처럼 세상이 흔들린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흔들리다가 휘돌다가 꽃잎처럼 밟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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