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핑계일 뿐

 

어둠이 술병을 들고 온다.

초승달도 한 잔 하고 싶어 한다.

한 잔 두 잔 취기가 돌자

초승달이 술잔 속으로 끼어든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 남자,

오늘 하루만 빌려 달라 한다

들이키면 사라지고

채우면 다시 나타난다.

술은 핑계일 뿐 취하는 건 이유가 있다

-전국계간지편집자회의 사화집에서

 

 

술에 취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부터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복잡한 세상사에 머리가 아파 술을 빌리는 이도 있다. 하루 일이 고단하여 그 피로를 술로 푸는 이도 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술의 뒤로 숨기도 하고, 현실의 압박을 피하기 어려워 술로 가리려 드는 이도 있다. 고독을 이기지 못해 술의 힘을 빌김려 밤을 건너가는 이도 더러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인생의 기쁨을 더 누리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한다. 좋은 우정이 소중하여 술로 정을 나누기도 하고, 감동적인 자연을 벗삼아 하나뿐인 인연과 함께 축복 받은 생명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한다. 님이 있어 술이 들어가고, 님을 그리며 술이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술의 덕은 악이라기보다 선일 가능성이 많은 대목이다.

이 시인은 어둠이 몰려오자마자 술을 찾는다. 어둠과 술은 좋은 친구이다. 혼자 들이키는 술잔 속에 한 잔 달라 초승달이 빠진다. 애꿎은 술잔 속의 초승달만 들이키는 이유가 따로 있다 한다. 아마도 그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아픔이라기보다는 기쁨일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지난한 삶의 고통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만난 기쁨이 더 커보인다.

김영진 시인은 늦깎이 시인이다. 다양한 인생의 경륜이 시 속에 녹이 있다. 젊은 시인 못지않은 치열성으로 시 속에 빠져 산다. 그에겐 수많은 아픔들이 이제 긍정적인 기쁨으로 되살아나고 있다./장종권(시인, 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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