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 눈가에 무더기로 쌓인 눈곱을 치운다. 생각이 자꾸 생각 을 낳느라 시달렸다. 일어나니 속눈썹이 붙어 떨어지지 않 는다. 물 묻혀 말라붙은 눈곱을 떼어낸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앙탈이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눈두덩이, 눈꼬리 에 레몬을 매단 낯선 여자의 풍경이 거울 속에 있다. 코가 맹맹하다. 화장지를 한지삼아 콧물을 탁본한다. 주 름 잡힌 성
여자 3호 그녀는 탐색 중이다.누군가 변덕을 부리거나 그녀를 믿지 못할 때면주저 없이 재탐색을 시도한다.창에 불이 켜진 동안은 쉬지 않는다그녀의 혀는 구강기 아이처럼 말랑할 것이다 그녀는 좌우로 굽은 도로를 기억한다.들판과 강물을 기억한다.들판과 강물 사이 절집과 밥집의 내력을 알려준다 그녀가 사라졌다.정지된 화면은 막 지나온 해변을 꽉 물고 있다탐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남태식 시집 에서 남태식 시인은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정무현 시인 '풀은 제멋대로야' 출판기념회가 지난 6일 부천 복사골문화센터 5층에서 열렸다.정무현 시인(본명 정기재)은 1981년에 공직에 들어와 부천시청 건설교통과장을 마지막으로 내년 6월 정년을 앞두고 현재 공로 연수중에 있다.그는 지난해 리토피아로 등단한 이후 1년 만에 시집을 냈다.시집 제목 '풀은 제멋대로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꼿꼿한
24년 만에 긴 침묵을 깨고 박일 시인의 제2시집 「바람의 심장」(리토피아 간행)이 나왔다. 72편의 시를 제1부 유월(18편), 제2부 영종도(18편), 제3부 단풍나무 숲에서(18편), 제4부 옛집(18편)로 나누어 수록한 이 시집은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지 30년만의 결산작이다. 오홍진의 라
정신을 갉아먹는 시에 푹 빠진 김다솜 시인 두蠹 비타민, 미네랄을 갉아먹기 좋아하는 그는 우엉, 연근, 당근, 피트, 색색의 뿌리를 먹는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꽃, 풀, 잎사귀와 바람을 조각조각 갉아 먹고, 햇살도 몰래 갉아 먹는다. 과자와 불량식품이 목구멍을 갉아 먹게 하는 그는 피부를 위해 태반도 먹고, 녹용도 먹는다. 한약, 양약, 건강
산골 연� じ自� 새벽 호미질은 거대한 명상입니다 어느 순간 새들의 노랫소리 멀어지고거친 자갈밭 호미 날 부딪치는 소리만 남습니다 머리가 맑아집니다 안개 낀 골짜기에 있는지이슬 젖은 풀 뽑고 있는지 모른 채호미 날만 보입니다 이내 나도 없어집니다-최정 시집 에서 최정최정 시인은 1973년 충북 중원에서 태어나 인하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풍금소리멀리서 바람을 타고 오는 잊히지 않는 소리다. 풍금소리가 있는 교정은 웃음이었다.태양은 시뻘겋게 열이 오른 체 머물기도 했고 구름은 검은 보자기를 펴고서 바쁘게 지나갔다. 온통 교정이 적막으로 잠길 때에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세찬 물세례를 퍼부었다.풍금소리는 시인을 만들고, 음악가를 만들고, 건축가를 만들고, 마침내 도시의 꿈을 만들었다.풍금 타는
마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새 잡히지 않는 새 한 마리 잡으려고책걸상을 새로 들여놓았다자리를 치우고한참을 바라보았다허虛, 忘망을 잡았다 요동치는 마음을 지켜보는또 다른 마음들고 있던 의자를 놓아버렸다허망을 놓아버렸다-이명수 시집 에서 이명수1975년 으로 등단. 시집 ,
아파트 그곳 사람들은 왜인지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고 그래서인지 추락하는 아기 새가 많았다.땅을 잃어버려 유랑자 같았고 하늘은 막혀있어 무한도 꿈꿀 수 없었다.왜인지 그곳 사람들은 죽음으로 가는 문을 막지 않고 살았다.죽음으로 가는 문이 그렇게 많이 열려 있는 곳은 그곳밖에는 없었다.그곳에서 사람들은 때론 삶을 꿈꾸기도 하였다.-계간
버려진 흔적 산비탈에 버려진 쪽바가지 한 개파란 잔디가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산 속까지 끌고 온끈질긴 인연떠나기 아쉬워인적 드문, 여기까지 흘러왔나산새와 초연한 바람이 찾아준다차라리 병든 몸, 가벼운 한 점의 가루 되어저 바가지에 얹혀사라지는 바람이고 싶다-이복래 시집 중에서 이복래경남 양산 출생. 한맥문학으로 등단. 내항문학 동
마주 보기 덕적고등학교 3학년은학생이 한 명이다 교실은 반 칸짜리책상 하나 마땅히 둘 곳 없어창가에 붙여 놓고서 일어서 인사를 한다김정아!네!갑자기 할 말이 없어 얼굴을 마주 보고 말뚱거린다돌아서면 넓은 칠판숫제 창밖을 보면솔밭에 모여 있는 소나무 몇 그루와부드러운 양팔 아래 흐르는 안개우리는 매일곁눈질로 사랑을 한다-오석균 시집
호박꽃 햇살 좋은 담장 너머로 선발대회가 한창이다.과시하려는 몸사위로 매혹적인 에스라인을 뽐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노란 별꽃들이 순번대로 피어난다. 넉넉한 프레어 스커트를 착용할 것과 까실까실하고 날카로운 살갗으로 호리호리한 허리를 감싸 안아줄 것, 지조 있는 품위와 후덕한 인상으로 관대하게 웃어줄 것과, 매일 한 번은 벌에게 꽃가루를 내어 주
어둠과 고요 사이 어둠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놀란 가로등이 화들짝 깨어난다.가로등 앞장세워 불을 밝힌 수첩들이묘연한 어제의 행방을 찾는다.어둠은 밤새 아리송한 길을 만들고드러누운 도시를 일으켜 세운다.어둠과 고요의 사이에서 춤추는 오늘이 달아나는 겨울 모퉁이를 순식간에 삼킨다.어둠을 삼키고 고요마저 삼킨다.길섶 야윈 풀잎과 벌거벗은 나무들이 흔들린다.마른
맹지타인의 지번으로 팔과 다리를 묶인 자루형 토지이다. 메아리가 염장된 통조림통을 끌어안고 있는 포대자루이다. 불안만 발효시키고, 있는 무명자루이다. 어둠으로 꾹꾹 밟아 놓은 길이 없는 자루 위에 부드러운 햇살 한 점 물고 온 바람이 실없이 끈 자락을 흔들고 있다. 뽀얀 뺨을 부비며 서성거리는 두려움이 자루 속을 채우면 잘잘하게 접힌 웃음들이 텅 빈 허공을
일곱 살 장독대로 부엌으로 우물가로부리나케 뛰어다니던 큰누나가병아리를 밟아 놀란 병아리는 죽었다 큰누나가 미웠다죽은 병아리를 장사지내며큰누나 신발이 미웠다나는 울음을 터뜨려 복수했다 한쪽 눈이 먼 큰누나나를 업어 키운 큰누나엄마보다 더 늙은 큰누나는어느새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었다 -최일화 시집 에서 안성 출생. 1991년 문학세
너도바람꽃 바람이 빨래의 물기를 말끔히 거두어 가면 빨래는 가벼워진다 네 속에 든 바람이 내 안의 물기를 거두어 갈 때나도 가벼워진다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진다 산이라도 바다라도 사막이라도 비록 그곳이 미명일지라도 내가 날아가는 그곳에서너는 더없이 가벼워질 것이지만 찾고 또 찾아봐도 냉랭함과 스산함뿐 훠이, 훠이 네 하얀 솜털에 묻혀 훅 불면 날아가는차라리
시방 노래허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필연이 어떻더냐 등그더냐 모지더냐 사랑을 속이고 미움을 속여분 아가, 길은 걸어간 뒤에 생긴다 안 하더냐 걸어온 길 보이면 인자는 헤어지거라 인자는 변절하거라 둘러댄 말이라메, 그 인사 어사화가 어울리기나 하겄냐, 회자정리라 안 하더냐 이쯤에서 정리해불고기회는 왔을 때 퍼뜩 잡아야제 이년아.-홍성란 시집 &
나는 징이다. 바람이 와서 툭 툭 칠 때마다 펄 펄 끓던 불가마가 생각난다. 온 몸이 쇳물로 녹여지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고열과 옹고집이 쇠망치로 펑 펑 매질을 당했다. 산다는 건, 바데기에 한 뜸 한 뜸 불 담금질을 견디는 거였다. 내안의 울음 깨기였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옹이로 박힌 울음주머니가 부종처럼 부어올라
깍지길 갈매기와 손을 맞잡고 바다 위를 난다.파도에 몸을 싣고 해파랑길 걷는다. 고운 모래밭에 천 년의 발자욱을 남긴다.할배소나무와 할매소나무는 니캉 내캉감포 바닷물이 마를 때까지 천년만년 살자 한다. 앙숙이던 다물은집과 안의원집이 마주보며 웃는다.해안을 따라 둘레길을 거닐면 갯내음과 태양이 키운,해국이 바위와 깍지를 끼며 파도와 숨바꼭질한다. -계간 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