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과 나비 열세 살 소녀 가장이일흔 살 할미를 위로하고 있었다. 식은 팥죽 한 그릇을 두고등신대의 울음 덩어리가 서로 엉겨간간이 들썩이며 빛나고 있었다. 굴신도 못하는 시든 할미꽃 위에지친 나비가 날개를 접고 얕은 잠에 잠겨 있었다.합죽이가 된 입을 오물거리며그래도 이슥한 생을 건너온 마른 꽃잎이잠든 손녀의 귓불을 가만히 빚어주고 있었다. - 장이지 시집
詩魔그녀는 하얀 별 아름다운 옷이 발목을 잡는다. 아름다움에 발목 잡혀본 자는 안다. 왜 아름다운 것은 불편한가. 아름다움은 죽음이라는 걸. 별이여 하얀 별이여! 그녀는 하얀 별인 것이다. 죽지도 못하고 우주에 떠 있는 미이라 같은 별. 그녀는 우주에서 자신을 태우고 떠 있는 하얀 별 그녀의 사랑은 하얀 별.그녀는 하얀 별 아름다운 것이 발목을 잡는다. 아
천선자 시인의 첫시집 가 도서출판 리토피아에서 출간되었다. 작품은 4부로 구성되어 총 8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천선자 시인은 2005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했다. 막비시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천선자는 어둡고 무심한 세상 속에서도 섬을 만들고 등대를 만든다. 밝은 불빛으로 인간들을 끌
유마거울장독대 간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간장은 보이지 않고 한 단지 가득 하늘이 들어 있습니다 엷은 구름 한 장, 헤진 모시적삼처럼 수막에 떠있습니다 간장 속, 그 속 메주가 푹 삭아 거울이 된 것이겠지요 포대기 냄새가 나는 것이겠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당신의 그림자, 눈을 닮았습니다 잎맥만 간신히 남은 이파리 하나 바람에 흘러갑니다 -계간 리토피아 여름호
가리봉 쪽방들속도와 정밀함을 위해 집적회로가 필요하다구로디지탈 단지 근방의 쪽방들은반도체만큼이나 정교하게 나누어져 있다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방은 작게 쪼개져서고밀도의 집적회로가 되어간다방과 방을 치밀하게 잇는 골목은신호가 돌아다니는 회로와 같다 소문들이 저항도 없이 순간에 퍼지고 나면 소문을 처리하느라 방들에서는 불이 켜졌다가 꺼진다구로동이 디지털 단지가
피는 피 숨김없지, 피는 숨김없이 전부를 걸지 떨릴 때도 슬플 때도 숨찰 때도 귓불과 입숭, 손톱과 음순에 이르기까지 두려움 없이 달려가 피어나지 외길의 전방만 향하는 피는 병명도 설명도 없는 맹목盲目, 숨마다 걸음마다 쿵쿵 소리 내며 염천炎天의 햇발처럼 홧홧한 자국 남기지 처음일 때 문 열고 나오는 피, 끝일 때 문 닫고 나오는 피, 구멍마다 기어이 피어
아름다움 깨어진 계란에서 얇은 막을 타고 흐르는 노른자의 침사라진 뽀얀 젖가슴 대신 쩍짝이 젖가슴의 수평 칼금배설물을 받아 재채기하는 구멍 막힌 좌변기의 동심원머릿속의 회로를 보여주는 머리칼 없는 투명한 대머리골목길에서 딱딱해진 개똥을 밟은 발바닥의 오지랖버려진 빵 봉지가 틀어막고 있는 구멍 난 공원의 벤치얼굴을 노트 삼아 레이저펜으로 꼭꼭 눌러 쓴 점자
청도맥주여행 첫날 술 사냥을 나섰다.소문난 청도맥주로 가라앉지 않는 연변의 하이에나 밤거리.그 밤을 고려촌이라는 술로 채우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연변대 미술철학 교수가가짜를 마셨다고 한바탕 후닥거렸다. 다음날 그 철학교수는 청도맥주로한중문화예술소통을 위한 건배를 외쳤다.잔마다 흘러넘치는 거품 그들도, 나도 괴짜 철학이 난무한 문학과 미술도 가짜의 거품을
불륜어느 날불현듯, 숨어 들어온 손길난 거부하지 못했다살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이란! 온몸을 더듬는그의 엉큼함이라니쿵쾅대는 심장을 들킬까 숨죽이며열꽃 암내를 피우며 그를 탐한다 만인의 연인 사월의 햇살,난 그와 불륜 중이다-정경해 시집 에서 정경해충북 충주 생. 1995년 신인상. 2005년
아마, 토마토 토마토즙 흘러내리는 식탁에 앉아있었어 달콤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지 처음부터 그걸 먹으려는 의도는 없었어 여튼,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 거야 식탁에서 흘러내리는 토마토즙 기억하겠지만 첫 만남은 갓 연두를 벗어난 붉은 짭짤이 토마토 울룩불룩 포즈로 접시에 담겨 있었어 연애의 시작은 이런 거였지 붉지 않아도 붉게 터질 거라고 상상하는, 그래도 토마
지금 선포산*에는가지 끝을 비집고 나온진달래꽃 봄 먹는 소리가귀 속으로 들어앉는 오후그 위로 눈 부릅뜬 송전탑들은 서로 줄다리기를 한다. 겨울을 헤치고 나와 잠시 쉬는 생강나무들이좁쌀 같은 꽃을 매달고온 산에 생강냄새를 퍼붓는다. 산 아래서는 봄쑥들이 숙덕숙덕 키를 재고등으로 떨어지는 작은 한나절은 저녁 준비로 분분하다. 젊은 날은 멀리 있어서종종걸음으로
꿈의 바다가 가슴에 있어 삶이 따뜻한 신현수 시인바다와 외로움바다는 나를 떠나 멀리 있다. 바다는 그냥 놓고 보기만 하는 것, 바다에 손을 대면 이미 바다가 아니다. 놓인 그대로 건드리지 않고 먼 곳에서 쳐다보기만 하는 것. 억지로 바다 가까이 가면 바다는 갑자기 외로움으로 된다. 바다 가까이 가면 바다는 외로움으로 된다.-신현수 시집
백령도 봉선화 도레미노래방 지나 진촌양품점 지나일출 맞으러심청각 오르는 길 주인도 떠나고울타리도 없는그 집 마당 밤새얼마나 큰 손님 다녀가셨는지흐드러진 몸빛해보다 밝다-류제희 시집 에서 류제희당진 출생. 1995년 으로 등단. 시집 , 외.
木蓮아침 창문을 열어 새벽을 마신다.아, 저기 창가에 환한 얼굴 하나.이 아침 낮달보다 밝은 목련 한 송이 열려 다가오는 반가움이여!그건 숫제 늙은 가슴에 열리는 우주 한 송이 피어나는 기쁨일레.그리운 임을 맞듯가슴에 안겨오는 목련꽃 빛깔의 축복내 가난의 뜨락에 목련이 피었구나.신선하디 신선한 목숨의 빛으로-.-랑승만 시집
취모검객吹毛劍客―무산기담霧山奇談․2내가 아는 취모검객은검이 없다손가락 하나로휘익터럭을 베어버린다 하지만그의 검술은손가락보다는눈길로 베는 수가 더 많다번쩍찌르는광채의 찰나를 보았는가 하면, 어느새그의 눈길의 칼은 칼집에 들어가 있다 내가 만난 취모검객은그림자가 없다 - 48호에서이가림1966년 신춘문예
너는, 어디서 왔니?포플러 이파리가 찰랑거리는8월의 저녘어디선가,태초의 소리 들려왔네그것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들려주던 파도 같은 노래였네신생아실 유리 칸막이 밖에서 너를 불러보네포플러 이파리야!순간, 찬란한 거울 하나가 세상을 향해 눈을 번쩍 뜨고 있었네아, 눈물처럼 환한 빛이었네- 47호에서정서영2005년 ≪리토피아≫로
아는 놈 아는 놈야?모르는 놈인데? 턱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모르는 놈이다- 25호에서 김영승1986년 으로 등단. 시집 , , ,
원죄原罪 뱀을설죽이면다시살아나반드시원수를갚는다던어른들이들려준말때문에그날어린우리들은가재를잡다돌에설맞아달아나는뱀을정신없이뒤따라가두려움으로단단해진돌을던져뱀을죽였다흙냄새를맡으면다시살아난다는누군가의말에그뱀을동구밖나뭇가지에걸어놓았다 그날 이후나는아직도 동구 밖 나뭇가지에 걸려 비를 맞는다 -유정임 시집 에서. 유정임2002년
강아지 나라 강아지 한 마리가 절름거리며 길을 건넌다.강아지 한 마리가 절름거리며 뒤를 따라간다.강아지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길을 건너서 인도를 지나서 골목길을 지나서쓰레기통을 지나서 소방호스를 넘어서버려진 빗자루를 돌아서 통나무를 돌아서강아지 두 마리가 절름거리며 어디로 가고 있다.똥 묻은 강아지가 앞서서 절름거린다.오줌 저린 강아지가 뒤따라 절름거
숭어 지난겨울에도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눈이 멀었네어두워지는 포구의 뱃전에 앉거나 기대어서 귀기울여 보지만삼남 천지에 네가 왔다간 소리는 듣지 못했네먼 바다를 건너와 하루 종일 내리던 눈보라 속 아직도 젖은 하늘에 길이 있다면지워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은종이 같은 비늘 하나이제 어디로 가랴고 내게 다그쳐 부는 바람만 곁에 있어서지난겨울에도 여전히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