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 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 결승전 1928.6.25.동아일보

신태영은 제주출신으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체육부 주장을 맡았고 1928년 6월 YMCA주최 동아일보 후원 제 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 라이트급 출전하여 경신고보 이혜봉와의 결승에서 약간의 파울을 범하였지만 유효타를 많이 날려 압도적 점수차로 우승하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30여명으로 대부분 YMCA 체육부에서 정식으로 권투를 배운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주먹을 사용하는 경기라니까 깡패와 건달패가 자신의 주먹을 자랑하려고 출전하였다. 그래서 호기심을 갖고 많은 관중이 모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28.6.24.)

1930년 신태영은 일본 도쿄 전수대학 상과로 유학을 갔다. 전수대학 권투부에 가입하여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였다. 이미 도쿄 유학생 중 일본권투 구락부 소속 서정권, 강촌, 일본제국권투협히 소속 식촌과 금정, 소림 등이 프로 권투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플라이급 서정권은 일본 1인자인 원정과 경기에서 1승 1무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1932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신태영의 일본에서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전수대학의 신태영군은 6개 대학 리그전도 출전하여 군의 독특한 파이팅스피리트9열열한 투지)를 수만 관중에게 보여주었으며 정영길군도 중경까지 원정하여 군의 신기한 묘기로 무수한 관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여 주었다.”

신태영은 전일본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라이트급에서 우승하는 등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여 전수대학 권투부 부주장도 맡는 등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1932년 6월 도쿄 유학생 권투선수들이 조직한 금강권투구락부는 도쿄 YMCA 후원을 받아 여름방학 동안 경성 원정 경기를 계획을 세웠다. 신태영도 페더급 선수로 출전하였다.(동아일보 1932. 6.12.)

신태영은 제 10회 하계올림픽 일본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우승하여 페더급 대표로 출전했다.

1934년 4월 일본 전수대학 상과를 졸업한 신태영은 프로권투 선수로 전향하여 활약하였다. 또한 도쿄 유학생 권투선수들의 꿈이었던 권투전용도장이 새로 신축되면서 권투 직업부를 맡아 지도하였다.(동아일보 1934. 2.8.)

이후 신태영은 귀국하여 인천으로 직장을 구하러 왔다가 휘문고보 권투선수 출신 한태열과 YMCA 체육부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는 권충일의 소개로 인천무도관 유도사범 유창호를 만났다. 유창호는 인천무도관 내 인천권투구락부를 개설하여 권투선수 양성을 요청하였다. 유창호의 요청을 수락한 신태영은 인천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권투를 지도했다.

신태영은 인천권투구락부에서 열정적이고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각종 권투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배재고보 통학생 김병옥은 인천권투구락부에서 직접 지도를 받아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밴텀급 우승을 하였다. 또한 박순철도 중국 프로권투선수로 데뷔하여 중국 페더급 챔피온이 되었다. 인천권투구락부 동문인 이종수도 중국 프로권투 선수로 함께 활약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권투의 대부가 되었다.(인천체육의 발자취, 2013. 63~64쪽)

해방이 되면서 신태영은 1945년 10월 9일 인천 체육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인천체육발전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신태영은 인천체육협회 이사장으로 1945년 11월 18일에 열린 '자유해방경축 인천시민 대운동회'를 시작으로 육상, 야구, 축구, 수상, 씨름, 농구, 배구, 궁술 등의 대회를 주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21일, 신태영은 대대적인 혁신을 도모하여 협회장으로 곽상훈(郭尙勳)을 선출하고 자신은 이보운과 함께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총무부는 정용복 등 4명, 재무부는 김수복 외 4명 등이 맡으며 협회는 명실 공히 최고의 인천체육단체로 거듭난다. 더불어 협회는 기존 종목 외에도 역도, 등산, 스키 등의 종목도 추가하였다(인천일보 2016.16. 조준호의 그라운드)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 포스터

신태영은 1946년 2월 20일 3.1독립운동 기념대회 준비회의 진행부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1947년 좌익진영 주최 3.1독립운동 기념대회에서 레슬링선수 김석영, 권투선수 최관오, 유도사범 이임옥과 함께 경호부에서 활동했다. 신태영이 좌익활동은 한 게기는 인천적색그룹 사건의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한 휘문고보 권투선수 한태열의 영향이 컸다. 일본 검찰의 조서를 보면 한태열이 인천 권투선수들을 포섭했다고 한다. 또한 유도사범으로 해방 직후 치안대장을 지낸 이임옥도 제주출신으로 신태영이 그를 인천 무도관 유도사범으로 활동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레슬링 선수 김석영, 유도 사범과 택견 전수자 권충일 등과의 교류로 좌익활동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신태영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부역자로 밀고 받아 해병대에 연행되었다. 경찰, 해병대, 군첩보대, 헌병대 합동 수사대에 의해 부역자로 처리되어 민간선박에 태워져 가다가 인천 팔미도 앞바다에서 수장당하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서울. 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진실과 화해위원회. 521~522쪽)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인천에서는 운동경기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였고, 일본선수를 한 방 주먹으로 넘어가게 한 권투는 레슬링과 함께 그 중심에 있었다. 일본 권투 국가대표로 활동한 신태영은 인천권투구락부에서 인천 열혈 인천청년들에게 권투를 지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인천 체육이 보다 조직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인천체육회 결성을 주도하여 인천체육을 세계정상으로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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