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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인천적색그룹 활동가, 권투선수 한태열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한태열(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인천뉴스

한태열은 1914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이사왔다. 그리고 인천 사립 박문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1933년 7월 중퇴했다.

한태열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1933년 12월 전보현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전보현은 1933년 인천적색그룹 조직을 주도한 인물이다.(인천적색그룹사건 검거에 관한 건, 경고특비 제895호 소화 10년 4월 4일) 전보현이 조직한 인천적색그룹은 일본제국주의 절대반대 전조선노동자농민의 해방 운동 실천운동 전개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한태열이 사회주의 운동에 본격적인 나선 것은 1934년 8월 상순 전보현이 황해도 해주에서 적색그룹 조직 확대를 위해 떠나는 전날 회합에 참석하면서 부터였다. 회합은 인천축항 근처 냉면집 동양헌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태열은 박영선, 한창희, 이성래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인천적색그룹 조직 활동을 유지할 것과 동양방적 인천공장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전 공장으로 적색노동그룹 조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교시는 다음과 같다.

1. 의식화 훈련을 무의식 대중들이 받도록 한다.

2. 산업 각 부문을 근거로 설치한다.

3. 특히 동방(동양방적 인천공장) 중심으로 주력을 쏟는다.

4. 동지 포섭에 만전을 기한다. (인천적색그룹사건 검거에 관한 건, 경고특비 제895호 소화 10년 4월 4일)

동방 적색그룹 조직은 1934년 4월 전보현에게 사회주의 사상 지도를 받은 동양방적 직공 한창희가 1934년 4월부터 8월까지 동료 직공 박영선, 이성래 등을 포섭하여 한창희, 박영선의 집과 동공원 등지에서 수십 차례의 회합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공장 내 노동운동의 방향을 잡고 강령을 제정하고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조직 활동을 하고자 했다.

한태열은 동방적색그룹 조직원 한창희, 남궁전, 김환옥, 허차길 등과 함께 인천부립도서관에서 사회주의 관련 책을 빌려서 부근 동공원이나 화수리 한창희 집에서 독서모임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공장 내에서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한태열은 하수옥, 최영민, 노학식, 이창환 등을 포섭하여 농민의 어제와 오늘 등 사회주의 서적을 독서하는 등 의식화 교육을 지도하고 교양하는데 주력했다.

1935년 1월 17일 동양방적 인천공장에서 출퇴근 확인 명패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공을 일본인 수위가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음 날 이에 반발한 사패공 30명이 동맹파업을 감행하였다. 일본 대기업 상대 공장 인천 유치에 혈안이 된 인천부 당국에게는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마침 인천경찰서 고등계가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중심으로 적색그룹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천 노동단체 회원으로 활동 중인 최영택이 만석정 유마정미소와 재등정미소 그리고 동양방적 인천공장 내에 선전물을 배포하다가 고등계 형사에게 발각되어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 졌다.(조선중앙일보 1935.1.25.)

이후 인천경찰서 고등계는 동양방적 인천공장 적색그룹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조직세포를 색출하는 혈안이 되었다. 1935년 2월 25일 공장 안을 직접 수색하였는데 이석만과 서모 노동자 2명이 체포되어 엄중 취조를 받았다. 이들은 조선공산당 조직 활동을 하다가 복역한 바 있는 전과자로 공장 내에서 선전유인물을 배부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다.(조선중앙일보 1935.2.27.)

이때 핵심활동가 김근배는 인천경찰서 고등계의 감시망을 용케 피해 경기도 광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잠복 중이던 광주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는 김근배 취조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근거로 인천적색그룹 조직을 완전 와해시키기 위한 극비의 수사를 진행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35.5.7.)

 

▲ 조선중앙일보 1936.03.11. ⓒ 인천뉴스

인천경찰서의 수사망에 동방적색그룹 조직이 잡혀 체포되었고, 이어 인천적색그룹 활동가들도체포되었다. 이때 한태열도 체포되었다. 한태열은 재판과정에서 인천적색그룹 활동 일체를 부인하였다. 그렇지만 동지 한창희가 일본 검찰의 회유로 사실의 일부를 시인하면서 한태열은 징역 1년 6개월 판결을 받았다.(조선중앙일보 1936.3.11. 석간)

한태열은 권투선수로 인천 권투구락부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거나 동조하는 인천지역 청년들을 포섭하는데 주력을 쏟은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3월 11일 동방적색그룹 사건 재판에서 산하(山下) 재판장도 이런 경력을 주목하여 “피고인이 권투선수인만큼 권투계에서도 동지를 획득할 것을 계획한 일이 있지 않느냐?” 심문을 하였다. 한태열은 “결코 그렇게 계획한 바는 전혀 없다. 그들은 권투에만 전념하였지 내가 갖고 있는 사상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부인하였다고 한다.(조선중앙일보 1936.3.11. 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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