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1992년 4월 어느 날,

여느 때 같으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야했을 필자는 일명 ‘폭풍의 언덕’이라 불리던 인천대대학원 앞 잔디광장에서 열린 ‘인천대 총학생회 출정식’에 연사로 초청받아 연단에 앉아있었다.

당시 운산기계공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나는 인천대를 포함한 14개 초중고를 거느린 국내 최대 사학재단 선인학원 정상화 운동에 앞장서다 재단 측에 의해 초고속 파면을 당한 상태였었는데,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를 인천대 총학생회에서 출정식에서 초청해줬고, 그로부터 내 인생은 평범했던 교사에서 이른바 학원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 대변신을 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동 시대를 겪었던 많은 인천대 주체들은 생생히 기억하겠지만 당시 백장군이라 불리던 육군 중장 출신인 설립자 백인엽은 육군대장 출신인 친형 백선엽의 위세를 등에 업고 사학모리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그때 인천대를 포함한 모든 학교 앞에는 이들의 별자리 수를 합친 이른바 7성홍기가 위풍당당 휘날리던 기억이 새롭다.

[일찍 배운 도둑질]

▲ 해직 당시 PD 수첩에 출연했던 필자 모습

필자가 1979년 운산기계공고에 처음 부임해서 학교 측으로부터 가장 먼저 부여받은 임무는 가짜 생활기록부와 출석부 등 이중장부 작성법이었다. 내가 첫 담임을 맡았던 운봉공고 기계과에는 학년 당 20학급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4학급만 정상 입학한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16학급은 모두 부정입학생들이었다. 그마나 4학급 중에서도 앞자리 번호 61명 까지가 정상입학자 뒷 번호는 이상은 부정입학자였으니 내가 배운 이중장부 작성은 바로 정원보다 무려 5배나 많은 부정 입학생들을 위한 가짜 학적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 40년이 지난 지금도 멘붕으로 남아있는 큰 충격은 첫 출근한 나를 맞이해준 교장의 나이가 불과 32살이었다는 사실인데 당시 선인학원 초중고 교장들은 이렇게 자격도 나이도 무시한 채 온통 백인엽의 심복들로 꾸려져 있었다.

[학원 민주화의 발자취]

선인학원 민주화 투쟁은 80년의 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1980년 4월, 운봉공고 기계과 3학년 1,400여 학생들이 최초로 재단의 비리 문제를 터트리며 재단을 돌며 학내시위를 벌였고 당시 시위를 주동했던 우리 반 반장은 당연히 퇴학을 당했고 그 담임인 나에게도 책임을 물어 사표를 내기 직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백인엽이 ‘사학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파면을 면할 수 있었고 선인학원에는 최초의 관선이사가 파견되었다.

백인엽은 석방 후 이른바 ‘백파교수’로 불리던 자신의 추종세력들을 앞세워 재단 복귀를 시도하였지만 이번엔 인천대 학생들의 거센 학내투쟁에 막혀 그 꿈이 무산된다.

[이번엔 스승들이 나설 차례]

하지만 백인엽은 이들 백파를 앞세워 호시탐탐 재단복귀를 노렸고, 이에 백인엽의 재단 복귀는 불가하다는 대명제에 뜻을 같이한 선인학원 내 교사들과 인천대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수들이 “더 이상 학원정상화 문제를 학생들에게 떠맡길 수만은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인천대 총학생회와 연대를 하게 되었고, 선인학원 문제를 인천 교육의 사활이 걸린 사태로 인식했던 인천시민들의 참여로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당시 군사정권을 청산하며 들어선 김영삼의 문민정부와 그의 가신이었던 최기선씨가 인천시장으로 부임하며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구속을 두려워한 백인엽이 다시 선인학원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를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인천시에서 수용하면서 인천대는 시립대학교로 중고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으며, 장학식 교수가 인천대 초대 민주총장으로 장석우 교수는 인천전문대 민주학장으로 취임하고, 백인엽의 위세를 등에 없고 호가호위 파행을 일삼던 백파세력들은 대규모 파면조처 된다.

▲ 인천대 정상화운동 해직 트리오. 왼쪽이 장석우 교수 중앙 이세영 교사 그리고 필자

[학원정상화 운동의 주체는 학생들]

선인학원의 정상화 운동이 성공하기까지의 주역은 누가 뭐라 해도 인천대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여기에 학원 정상화 운동의 동력이 딸릴 때 뒤늦게 뛰어들어 불을 지핀 인천전문대 총학생회의 참여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었지만, 인천전문대 학장으로 부임한 장석우 교수가 집필한 ‘선인학원 정상화 기록집’에는 그러한 학생들의 활약이 미미하게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태를 관망하며 미동도 없었던 인천전문대 교수들의 학원정상화 활약상이 작위적으로 미화되어 기록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학원 정상화운동 초기에 우리 편에 서있다 백인엽에게 백기투항한 A교수가 훗날 본인이 학원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듯 과거를 포장하고 인천대 총장자리에 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먼 타국에서 전해들어야했으며,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경력을 앞세워 인천 교육감 자리에도 도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인천대는 안녕하신지요?]

필자는 오랜 동안 고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탓에 자주 고국을 찾지 못하지만 어쩌다 인천에 와보면 1980~90년 당시 부적합한 교육현장의 대명사로 불리던 13층짜리 고층 교실이 아직도 그 위용을 과시하며 그 자리에 서 있고 당시 항도실업고, 운봉공고, 운산기계공고 등 한지붕 세 학교가 한 건물을 쓰며 ‘인천의 도봉산’으로 불리던 초고층 건물에는 지금도 ‘하이텍고교’ ‘전자마이스터고’로 이름만 탈바꿈한 채 지은지 40년이 지난 건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 아직도 건재한 한 지붕 세 학교

또한 교육의 장이었던 옛 선인학원 수십만 평 드넓은 부지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필자는 “이러려고 내가 파면까지 감수하며 학원정상화운동에 매진했었나?”하는 자괴감에 빠져 드는데, 그나마 학원 정상화운동을 함께 겪으며 고락을 함께했던 교수님들을 만나 뵈러 송도로 옮겨간 인천대를 찾을 때면 제물포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조성된 캠퍼스를 바라보며 큰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이곳에도 학원주체들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지 이제 나로서는 알 수는 없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 터전은 저절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앞에 열거한 선배님 교수님과 인천시민들이 합심하여 이룩해 낸 매우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이니만큼 그러한 선배님과 교수님들을 보유했던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고 여러분의 모교인 인천대를 더욱 사랑하기를 소망하며, 아직도 해마다 4월만 되면 그때의 벅찬 감동을 추스를 수 없는 나의 소회를 담은 두서없는 글을 마친다.

[필자 소개]

장재선: 전 운산(현 도화)기계공고 교사. 1992년 ‘범 선인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 총무를 맡아 인천대 정상화 운동에 앞장서다 파면. 이후 교육부 재심에서 복직했으며 중국 대련외대 교수를 거쳐 현재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선교 및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jangsam112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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