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관의 베트남기행 3>

“씬 감언”

베트남 한 호텔 복도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1달러 줬더니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다. “고맙습니다”라는 베트남어다.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씬 짜오(안녕하십니까)”와 “씬 감언(고맙습니다)”은 익숙한 말이 돼 버렸다.

   
베트남 오토바이 천국<2005 김철관 기자>
특히 베트남 하노이에서 매력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남녀 평등의식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비친 하노이 오토바이 행렬에서도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남자의 전유물같이 느껴졌던 오토바이가 이곳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물론 새벽 오토바이 경적소리에 잠은 깼지만(너무 경적소리가 심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한 모습이 정감 있게 다가왔다. 인간이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힘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관계없이 누구나 특정 오토바이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등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로 인해 은연중에 배여 있는 나의 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한국여성은 오토바이를 즐기는 경우가 거의 없고, 위험한 교통수단으로 알려져 회피한데다가 폭주족 같이 젊은 거친 남성들의 몫으로 각인돼 왔기 때문이다. 특이한 모습은 정말 심할 정도로 이곳 오토바이는 경적소리를 냈다. 물론 버스도, 택시도, 열차도 경적을 많이 울린단다.

   
베트남 오토바이 주차장<2005 김철관 기자>
도시가 시끄러울 정도다. 이들에게는 습관이지만 소음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정말 곤혹이었다. 또 하나 유심히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이 있다면 하노이 주민들은 뚱뚱하고 비만한 사람, 안경을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해도 살이 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고유차를 많이 즐겨 마시는 전통문화의 영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마시는 물이 석회성분이 많은 탓에 어릴 적부터 전통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습관화 됐다. 몸에 악영향을 미치는 석회성분을 없애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차로 인해 치아가 약해지고 탈색이 돼 이곳에서는 치과 의사가 인기 있는 직업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이곳 하노이에서 중국 건영으로 가는 열차가 있고,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열차로 30시간 걸린다. 열차도 운행하는 철길을 넘나드는 소수민족이 많기 때문에 경적을 심하게 울린다고.)

베트남하면 북부의 수도 하노이(HANOI)와 남부의 호치민( HO CHI MINH CITY, 사이공) 그리고 하이퐁을 생각한다. 베트남의 3대도시이다. 한마디로 베트남을 대표한 대도시에다 자치행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도시다.

호치민은 서울의 3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한다. 540만 인구로 해발10m내외의 낮은 평야에다 사이공강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 하노이와는 1738km 떨어져 있다. 이 거리는 열차로 30시간 거리에 해당된다.

폭 50cm 높이 70cm의 구찌터널이 호치민에서는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대인 1940년대부터 무기를 감추거나 비밀 통로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지방 게릴라들이 파 놓은 곳이다. 키가 큰 군인들이 들어가면 거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적이 굴의 구조를 모르고 추적할 경우 함정에 빠지기 십상으로 설계됐다. 호치민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노이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로, 지리적으로 홍강을 낀 삼각주 델타지대 비옥한 평야가 많은 곳이다. 4계절이 뚜렷하고 무려 300여개의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하노이는 유서 깊은 사찰도 많고, 프랑스 풍 건물도 많다. 특히 무채색의 건물들이 빚어내는 조화와 아기자기한 골목 그리고 포장마차와 가게들이 몰려 있는 거리의 풍경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하노이로부터 버스로 3~4시간 거리에는 유네스코 문화보존 관광도시로 지정된 하롱베이가 있다. 물론 하롱시에 있는 하롱베이도 다녀왔다.

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책과정 경제세미나에 이어 문화체험교육의 일환으로 지난 2005년 11월 3일 하노이시에 있는 문화관광지를 관람했다.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니 부슬비가 내렸다. 그 속에서 오토바이 행렬은 여전했다.

하지만 우산을 쓴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비를 많이 착용했다. 우산을 많이 쓰는 우리와 대조적이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내관광을 나서는데 다행히 비가 그쳤다. 먼저 호치민 생가, 영묘, 주석궁, 박물관 등 호치민 유적지가 있는 바딘광장을 찾았다.

   
호치민 영묘와 바딘광장그리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2005 김철관 기자>
바딘광장은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과거 우리 여의도광장을 상상케 했다. 바딘 광장 전면에 위치한 호치민 영묘. 영묘를 기준으로 양편에는 현수막처럼 보이는 두 개의 긴 직사각형 모양의 현판에는 녹색 바탕의 빨간 베트남어로 쓴 문구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바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는 의미심장한 문구였다.

   
호치민 영묘<2005 김철관 기자>

영묘는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베트남 참배객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세속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인 퍽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민족,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참배하느라 붐빈 곳으로 알려졌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뚱을 연결시켜 주는 사회주의 전통에 따라 호치민 시신도 방부 처리돼 순례지가 됐다. 이후 북한 김일성 주석도 묘에 안치돼 순례지가 됐지만 그 뒤를 이은 사회주의 지도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호치민 시신은 방부처리 관계로 볼 수가 없었다. 올 10월 3일부터 12월 20일까지는 부패방지를 위한 방부처리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방부제처리 기술이 뛰어난 러시아로 옮겨, 새 단장을 해오게 된다. 호치민 시신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이 기간을 피해 여행을 해야 한다. 사실 너무 아쉬웠다. 가장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좋아했고 다산이 고을의 수령을 다스리는 법을 기술해 놓은 ‘목민심서’에 심취했다고 알려진 호치민.

평소 검소한 생활과 베트남의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한 호치민의 본명은 ‘응우엔 떳 타인’이고 호치민은 ‘빛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50여개 별명 중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대부분의 베트남 국민들은 “호치민은 죽지 않았다.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1930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산당을 창건해 1946년부터 1969년 사망할 때까지 베트남 대통령을 역임했다. 1969년 9월 2일 숨을 거둘 때까지 평범하고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호 아저씨’라는 애칭까지 붙게 됐다. 그는 측근 정치인들에게 3가지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죽으면 시신을 태워 베트남 남부, 중부, 북부에 뿌릴 것, 전쟁에서 홀로된 아주머니와 고아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 정치범들에게 베트남에서 살 수 있게 선심을 베풀 것 등이었다. 아이러니하게 호치민 유언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시신을 태워 뿌리라는 유언도 75년 9월 2일 호치민의 기일날 영묘로 모셔 시신을 안치했고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와 고아에게 선정 베풀라는 유언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 이후 남부 베트남 정치범들이나 부르주아 계급 등을 인간개조 합숙소로 보내 격리 차별해 화전을 일구어 살게 했다. 이렇게 정치범에게도 선심을 베풀라는 유언도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남부 베트남 국민 100만 명 이상이 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다 15만명이 수장되기도 했다. 역사는 이를 흔히 ‘보트피플’ 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딘광장 주변에는 국회의사당과 외무부 등 정부 관청이 들어서 있다. 국회의사당 2층에 있던 VIP실이 1층으로 옮긴 일화는 유명하다. 김대중 대통령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 재직 때 국빈으로 방문한 김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알아차린 베트남 정치인들이 국빈으로 모신 그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층으로 옮기게 됐다. 그 이후 VIP실은 영원히 1층에 있게 됐다. 정치인들의 배려가 돋보인 대목이다.

   
ㅁ김철관기자는 <인천뉴스> 미디어 전문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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