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김준근의 그림(출처 김광언의 한국의 뒷간)

1. 똥이 거름이 된 역사

10세기경 똥이 밭농사 시비로 사용되었다. 인분인지 가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봄 파종 이전에 밭농사의 밑거름으로 시비를 준 것은 분명하다.(최덕경; 동아시아 농업사상의 똥생태학, p.40) 16-17세기에는 논농사와 양잠이 확대되면서 인분뇨가 거름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재를 혼합한 오줌재와 똥재 및 인분을 시비로 활용했다.(남미혜: 조선시대 양잠업 연구, p.177) 잡초를 말린 후, 이를 태워 재로 만들어서 똥 오줌을 섞어 이를 발효해 보리밭에 뿌렸다. 전 해 베어낸 깨깍지를 대소변에 적셔 모판에 뿌리기도 했다.(민성기; 조선시대의 시비기술 연구, pp.292-193)

17세기 중엽에는 초목재와 똥을 섞은 똥재를 밭벼 모판의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풀에 똥 오줌을 뿌려 퇴비를 만들어 시비로 사용했다. 또한 한양 등 도시 근교에는 무, 배추 등 채소 재배를 하게 되고, 과실수 식수로 거름의 수요가 급증했다.(최덕경: 동게서. p.42)

2. 온돌 난방에서 나온 재를 활용한 지혜

똥은 강이 있는 마을에서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모래밭에 똥을 그대로 묻어 말렸다. 그리고 곱게 빻아 비가 온 다음 날, 논밭에 뿌리면 비료를 충분하지 못해 시들한 곡물이나 채소 등이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한다.

소를 기르는 농가에서는 말린 짚을 가마솥에 끓여 부드럽게 만들어 소화하기 편하게 했듯이 똥물도 가마솥에 끓여 살균을 한 후, 이를 밭에 뿌려 주면 시들한 작물들이 파릇파릇 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인구 급증한 한양 등 도시에서는 집들이 다닥 붙어 있는 까닭에 농가처럼 집주변에 잡초를 쌓아 똥오줌을 뿌려 퇴비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줌은 뒷간 구멍을 내서 오줌은 도랑으로 흘러가게 했다. 뒷간 바닥은 그냥 맨 땅을 파서 오줌은 그대로 땅에 흡수되고 똥만 남도록 했다. 똥에 수분이 있는 까닭에 금방 부패해 구더기 등이 생기고 악취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활용했다. 똥을 눈 다음, 재를 뿌렸다. 재를 수분을 흡수해 마른 똥을 만들었다. 그러면 농부가 돈을 주고 직접 똥망태기로 마른 똥을 담아 가지고 갔다. 오줌이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로 들어가 우물이 크게 오염시켰다. 콜레라 등 수인 전염병의 발생의 주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3. 똥 수거는 이렇게 했다.

뒷간은 똥통은 벽은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를 박아 놓았고 바닥은 흙을 다져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똥을 누도록 했다. 똥은 그대로 남고 오줌은 스며들도록 했다. 그리고 똥에는 재를 뿌렸다. 재는 똥 수분을 흡수해 단단하게 굳게 만들었다. 농부는 똥망태기에 담아 수거해 이를 빻아서 똥가루를 논밭에 뿌렸다. 이는 온돌 주거구조를 활용한 조상들의 생활지혜가 넘쳐 나는 면을 보여 준다. 온돌 구조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야 하는 관계로 항상 재가 나왔다. 재는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려 먼지가 되었다. 조상들은 재를 활용하는 지혜를 가졌다. 재에 물을 뿌려 잿물을 만들어 빨래를 할 때 천연 세제로 활용했고, 뒷간에 재를 비치해서 똥이나 오줌을 누고 나올 때 재를 뿌려 똥재, 오줌재로 만들어 시비로 사용했다.

대규모 농사를 짓는 농가에서는 뒷간에 똥항아리나 목조를 마련해 똥오줌을 모아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발효시켜 시비로 활용했다. 대부분은 똥장군은 옹기로 만든 항아리로 수거해 갔다. 나무장군은 항아리보다는 가볍고 깨지지 않는 장점이 있어 물장군, 술장군 등 많은 곳에서 활용하였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을 때는 나무쪽이 오그라들어 조각이 나는 일이 많아 다시 결을 이어야 하는 불편이 있어 똥장군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옹기 똥장군은 진흙으로 빚은 까닭에 똥물이나 악취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무게가 상당해 똥장군을 지게에 짊어지고 밭까지 운반해 버리기까지는 엄청난 무게를 이겨야 했다. 그리고 옹기는 작은 충격에도 파손되기가 쉬웠다. 특히 주둥이는 이빨 빠진 것처럼 잘도 떨어져 나갔다. 주둥이 마개는 짚으로 만들었다. 주둥이를 마개를 견고하게 만들지 않으면 똥물이 새어나와 땅에 떨어지면 악취가 진동했다. 그리고 곰삭은 똥물이 피부에 묻으면 똥독으로 고생했다. 악취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서강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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