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배다리시민모임홈페이지

인천 도심 한가운데 ‘배다리’가 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배가 닿다는데 언제부터인지 육지가 되어 흔적조차 없다. 아마 이곳이 도시형성의 근간이 되는 매립의 시발지가 아닌가 싶다. 나는 배다리와 50미터쯤 떨어진 금곡동에서 태어났고 장가들며 분가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전 찾은 ‘배다리’는 세월이 정지된 듯 예전 그대로였다. 넓게 느껴졌던 도로는 좁고 상가와 주택은 낡고 퇴색되어 쓸쓸함마저 느꼈다.

원도심을 중심으로 발전한 인천은 1960년 인구 37만 명에서 80년 초 100만 명이 되고 이제는 300만 명을 넘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도시가 팽창하고 생활 중심지가 신개발지로 옮겨가며 구도심은 자연스레 쇠락과 침체에 빠져든 것이다.

배다리는 원래 나루터였다.

19세기 말까지 큰 갯골을 통해 만조가 되면 배들이 드나들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 이야기쯤 되리라. 내 기억 속의 배다리는 바쁘고 활기찬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그 모퉁이에는 무소불위의 파출소가 있어 조심스레 지나다니곤 했다. 보행 위반자를 새끼줄로 쳐 놓은 사각 우리에 잡아넣고 몇 시간씩 서있게 하거나 강제로 장발을 가위질하던 1970년대식 순경도 거기 있었다.

북쪽으로는 청과물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여름이면 속이 붉은 ‘개골 참외’ 김막가라고 부르던 신품종 ‘노랑 참외’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푸르고 큰 ‘상 참외’를 지천으로 늘어놓고 팔던 ‘참외전 거리’다.

중간쯤에, 상인들이 애용하던 설렁탕 전문집 ‘삼강옥’이 있고 이름은 잊었지만 곰탕집도 있었다. 군 생활 중 휴가 오면 선친과 함께 해장국 먹던 기억이 새롭다. 3분쯤 거리의 동인천역은 반시간마다 오르내리는 기차 승객들로 번잡스러웠다. 유일한 역 앞 지하상가 입구에 서있으면 젊은이들 모두 거쳐 가듯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차비가 없을 때 서성이면 해결할 만큼 갈 곳이 뻔한 시절이었다.

동쪽으로는 쇠가 난다 하여 ‘쇠골’이라던 금곡동이 시작되고 송림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지금의 동구청사가 있다. 그 자리는 원래 소나 돼지를 잡던 도축장이었다. 비 오는 밤이면 쇠귀신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이 있어 꺼려하기도 했다. 재미난 것은 당시 손, 발에 동상(凍傷)든 사람이 많아 소의 내장에서 쏟아 놓은 누런 소똥 속에 남녀노소가 무릎까지 빠지며 서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부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한 삼태기씩 오물통에 쏟아놓으면 식기 전에 들어가려고 야단들이었다.

먼 곳에서 곱게 차려입고 찾아온 아낙도 결국은 쇠똥 속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모습이 민망스럽지만 별 치료방법이 없었으니 어찌하랴, ‘쇠똥도 약에 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던 시절이었다.

우리 윗동네에는 휴전이 되어 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며칠씩 숙영하던 서흥초등학교가 있었다. 월미도 외항에 정박 중인 수송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데 대부분 아침 일찍 이동하였다. 수십 대씩 줄지어 가는 덩치 큰 ‘GMC’트럭 위에서 젊은 병사들은 신나게 웃고 떠들며 귀향을 재촉했다.

이때쯤 우리들은 배다리까지 트럭 뒤꽁무니를 쫓으며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헬로, 오케이’를 연신 외쳐댄다. 병사들 중에는 이빨만 하얀 흑인들이 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은 두렵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휴대용 아침 ‘C-ration' 속의 짭짤한 비스킷과 '챰스'라는 새콤달콤한 사탕과 일회용 소금, 설탕, 커피, 추잉 껌 등을 마구잡이로 던져준다.

간혹 잼이나 땅콩 짓이긴 캔도 던져주는데 트럭의 '크랙션'소리에 놀라면서 푸르스름한 매연 속을 헤집고 열심히 쫓아간다.

미군들은 낄낄대며 재미있어 했지만 우리에게는 처절한 걸식이었고 배고픔을 달래던 애절한 몸부림이었다. 신통한 것은 누구라도 먹거리를 그냥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동인천경찰서 옆 간장공장 폐허 터로 갖고 온다. 그러면 대장(?) 격인 형들이 다 모은 후 형평에 맞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배고픈 시절 아이들도 공존 방식을 조금이나마 터득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배다리 고서점 거리 지척에 창영 초등학교가 있다. 1907년 개교하고 1910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니 112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내가 51회 졸업생이니 감회가 새롭다.

창영(昌榮)이란 1936년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뜻으로 지어졌고 이에 걸맞게 인천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이다. 교사(校舍)는 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철을 타고 지나다 보면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이 옛날 그대로 서 있어 아련한 추억에 젖곤 한다.

전쟁 통에 배움의 시기를 놓친 형, 누나들과 동급생이 되어 전교생이 6천 명에 달했다. 2부제 수업에다 한 반이 칠, 팔십 명에 달하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다.

학교에서는 기름기 뺀 우유가루와 옥수수가루를 배급 주었고 '산토닌'이라는 구충제도 먹였다. 한 끼를 굶게 한데다 독하여 세상이 노랗게 보일 때는 한, 두 시간씩 단축수업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발암물질이라는 하얀 'D.D.T'가루를 손 펌프로 속옷과 머리에 마구 뿌려 주었는데 이(Lice)를 잡는 데는 특효였다.

이 무렵 미국에서 보내주는 480-Ⅱ라는 무상 양곡이 아니면 연명하기 힘든 실정이었고 특히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는 고마운 식량이었다. 지금은 잊힌 보릿고개 속에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음울한 소식과 부황기 뜬 얼굴들,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로 세계 꼴찌 수준의 최빈국이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리라.

창영 출신 중에는 훌륭한 선배들이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인천 언론계의 선구자 고일(6회), 문화 정체성을 세운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9회), 민사소송의 틀을 세운 대법원장 조진만(10회), 서울대 총장 신태환(18회), 국회부의장 김은하(28회), 세계 일주 3번과 14번의 여행으로 140여 개국을 오토바이로 9년 넘게 다닌 여행가 김찬삼(29회),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살리고 장렬히 산화한 강재구 소령(40회)의 흉상이 오늘도 본관 앞에 꿋꿋이 서있다.

사람은 과거를 먹고 산다지만 고유명사가 돼 버린 배다리가 아직 거기 있어 소중한 '추억여행'을 한 기분이다. 더불어 옛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으니 '배다리'는 분명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