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기획 집단주택 히로나카상공주식회사 부평공장 사택촌 = 부평박물관

1935년 3월 동양방적 인천공장에서 남녀직공 모집공고를 했는데, 이전 해 7월 구인난과는 달리 만석정 일대가 혼잡할 정도로 입사지원자가 몰렸다. 춘궁기에 들어서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민층 여성들과 부모와 남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부녀자들이 인천으로 가출해 무조건 입사 지원을 하면서 발생한 사태였다. 이에 공장 측은 참혹한 생활에 처해 있는 부녀자를 선별해 채용했다.(일본 동양방적 100년사, 1983.참조)

그러나 그 해 8월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남녀 직공 모집 공고를 했는데, 3월 입사 지원 대소동과 달리 모집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구인난을 겪었다. 이는 만석정 일대에 일본제분 인천공장, 풍국제분 인천공장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대단위 공업단지 조성사업이 전개되면서 구인난은 고질적 문제가 되었다.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고질적인 여름철 구인난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천지역에 국한한 직공모집을 수해 지역과 호남지역 등으로 확대해 여성 직공 노동자를 모집했다. 이를 통해 공장 측은 예상외의 소득을 얻었다.

궁여지책으로 실시한 수해지역과 호남지역 여성 직공 노동자 모집이 의외로 각 지방의 직업소개소로부터 적극 호응을 받았다. 직업소개소는 14세부터 17세까지의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일본어 해독이 가능한 청소년 여성 직공 노동자를 손쉽게 모집을 해 주었다. 공장 측에서 각 지방 직업소개소로 여성 직공 노동자 모집 공문을 보내면 모집을 직접 알선해 놓은 까닭에 공장 인사과 직원이 해당 지방 직업소개소로 나가 면접을 통해 취업 결정을 하고 인솔해 오면 되는 일이었다.

‘지난 13일 오후 10시 22분에 군산역을 떠나는 기차는 14세부터 17세까지의 소녀 33명의 일당을 태우고 떠남을 고하는 기적을 다른 때보다 유달리 소리를 더 크게 내고 떠나는 소녀들은 머리를 내놓고 손수건을 내흔들며 어머니 혹은 아버지 혹은 언니하면서 손수건을 흔들면서 떠나는 기차 바퀴 소리와 함께 울며 그들을 작별하러 나온 부모형제들도 홈에 수백 명이 서로 기웃거리며 떠나는 기차를 향하여 잘 가라하며 손짓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등 군산역의 홈이 일시적 곡성화되었다. 이제 그 사실을 듣건대 인천에 있는 동양방적주식회사에서는 군산직업소개소에 직공 모집을 부탁하자, 군산부 사회과에서는 모집을 알선하여 전긔 회사 출장원 고하중태랑(高賀宗太郞)의 인솔 하에 그와 같이 출발한 터인데 그 응모된 소녀들은 14세부터 17세까지이며, 그의 전부는 자기내의 가정이 너무나 빈곤하여 굶주림을 참지 못하던 중 직공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은 지원자 70여 명 중 응모된 33명이라 한다.(조선중앙일보 1935.8.17.)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이들에게 아사지경의 극단적 상황에서는 벗어나게 해 주는 환희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일시적이었다.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공장 현장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통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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