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공약 어디로 사라졌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하여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정착과 통일한국의 기틀을 다지겠다." - 박근혜 후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 공약 중

"정치부패를 원천적으로 근절하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뢰받는 정치가 될 수 있도록 정치를 혁신하고 개방·공유·참여·소통을 통해 미래형 창조정부를 구현하겠다." - 박근혜 후보, '정치혁신을 통한 신뢰회복과 미래형 창조정부 구현' 공약 중 

지역과 세대간 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낸 제18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대한민국을 51.6%와 48.0%로 갈라놓았다. 절묘한 차이로 승부를 가른 요인들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신뢰'였다. 

전체 3072만 1459명의 투표자들 중 2위보다 3.6%p 차이로 앞서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많은 공약들을 내놓았다. 그중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착'과  '정치혁신을 통한 신뢰회복'이란 구호가 선거캠프 이슈로 줄곧 등장했다. 박 대통령의 '신뢰'란 용어가 선거기간 내내 강조돼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근혜표 '신뢰', 균열 심각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이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청와대

 


그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초기부터 신뢰에 금이 간 남북관계는 5년 내내 험악한 분위기로 치달았고, 안으로는 '고소영 강부자 내각'에서 출발해 '형님공천', '만사형통', '방통대군' 등으로 지칭된 온갖 권력형 비리들이 끊임없이 발생해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불신이 날로 고조된 상황을 만들었다.

단절된 남북관계와 친인척 비리로 얼룩진 권력형 비리를 보면서 박근혜 후보가 들고 나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정치혁신을 통한 신뢰회복'을 주제로 한 공약은 양두구육이 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당시 많은 유권자들에겐 큰 기대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2개월이 흐른 지금, 한반도 안보위기는 날로 심해져 가고 있다. 게다가 소통과 신뢰가 무너진 새 정부 인선 시스템은 또 어떤가. 시작부터 '인사참사'란 오명을 낳을 정도다. 마치 막장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해수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비롯해 출범 2개월이 지나도록 내각 구성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17일 문제가 됐던 인사들의 임명을 강행하는 것으로 무리수를 뒀다. 한마디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대국민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셈이다. 오죽했으면 야권에서 '총체적 난맥상'이란 핀잔이 흘러나올 정도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란 구호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무색해진 건 그것 뿐이 아니다. 후보시절 그토록 강조하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며 '국내 신뢰정책'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고장난 형국이다. 

그 중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공약은 우선적으로 상호간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데서 이행할 수 있다. 그래서 후보시절 박 대통령은 공약을 통해 "당국자간 남북대화 재개, 인도적 지원 활성화, 남북한간 및 북한과 국제사회간 기존 약속 확인 및 실천 시작 등을 통해 신뢰 프로세스를 작동할 것"이라고 못박은 바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는 이유는 뭘까. 미국이 한반도 상공에 이어 해상에서도 강도 높은 무력시위를 이어가고 있고 북한 역시 한 치 양보 없이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맞서고 있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박근혜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북한의 개혁과 개방, 비핵화를 위해서는 주변국들과 함께 대북 불신의 악순환을 끝내고 대화와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아갈 것을 기대했지만 정반대로 가고 있다. 박 대통령 취임 직후 실시된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통해 선보인 미국산 최신 무기들이 북한을 더욱 자극한 모양새다. 핵공격이 가능한 B-52 폭격기와 핵잠수함, B-2 폭격기, F-22 스텔스전투기 등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오히려  대북 강경정책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권 때보다 휠씬 더 한반도 긴장을 증폭시켜 놓은 양상이다.

대화와 교류를 통해 얼어붙은 신뢰를 녹여줄 것으로 믿었던 유권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맨얼굴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 정도에서 냉각된 신뢰가 더 이상 얼어붙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과 북의 신뢰 프로세스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취한 대북정책에서 그런 기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개성공단  운영중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남북대화와  교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질 않고 있다. 박근혜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북한으로부터 신뢰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신뢰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 내부에서조차 대북 정책과 메시지 전달과정에서 혼선이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어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 문제를 놓고 청와대와 통일부가 엇박자를 내는가하면 국무총리마저 정부 또는 청와대 방침과 전혀 다른 말로 혼란을 부추기는 꼴이 볼썽사납다.

북과 대화 정말 원하나?

▲ "박근혜 대통령, 대북특사 파견하세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회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북한의 전쟁 위협을 우려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북특사 파견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전략 핵 폭격기, 스텔스 폭격기가 한반도에서 폭격훈련을 진행하고 북한은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해 전시상황이라는 특별성명까지 발표하는 상황에서 자그마한 실수로 충돌상황이 발생한다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한반도 전쟁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대북특사 파견을 촉구했다.
ⓒ 유성호

 

안보위기 상황이 심각해졌던 지난 11일과 12일 사이에 발생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11일 오후 성명을 통해 북한에 개성공단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해 놓고도 처음에는 공식 '대화 제의가 아니다'라고 부정했다가 이날 저녁 박 대통령이 국회 외교.국방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을 만나 "북한과 대화할 것"이라고 밝히자 돌연 '대화 제의가 맞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데 불과 하루가 지난 12일 정홍원 국무총리는 "대화를 하자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또다시 혼선을 키웠다. '대화 제의'를 하는 과정에서도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북 메시지와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박근혜 정부를 들여다보면 새 정부 관료들이 과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무엇인지, 정확이 이해나 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정부 출범이 2개월을 맞고 있지만 국무총리를 비롯한 장·차관급 인사는 물론 사법부 수장들까지 부실검증 또는 수첩인사의 한계로 줄줄이 낙마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래서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고사하고 신뢰받는 정치 혁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앞선다.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던지 보수신문들까지 나서서 박근혜식 인사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힐난할 정도다. <조선일보>는 16일 사설 '윤진숙 장관 성패에 정권 운명 걸겠다는 건가'에서 "개인적 신뢰와 국민적 신뢰, 둘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는 자명하다"며 대통령이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충고했다. 이날 <동아일보>도 '박 대통령, 인사방식 바꾸고 국민과 소통하길'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툭하면 야권을 탓하거나 임기응변식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에서 이젠 벗어나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신뢰는커녕 늘 갈등과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후보시절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개방과 공유, 참여와 소통을 통해 신뢰를 하나하나 쌓아나가길 바란다. 그것이 박근혜표 '신뢰' 공약을 믿고 찍어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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