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깨어진 계란에서 얇은 막을 타고 흐르는 노른자의 침

사라진 뽀얀 젖가슴 대신 쩍짝이 젖가슴의 수평 칼금

배설물을 받아 재채기하는 구멍 막힌 좌변기의 동심원

머릿속의 회로를 보여주는 머리칼 없는 투명한 대머리

골목길에서 딱딱해진 개똥을 밟은 발바닥의 오지랖

버려진 빵 봉지가 틀어막고 있는 구멍 난 공원의 벤치

얼굴을 노트 삼아 레이저펜으로 꼭꼭 눌러 쓴 점자 일기장

하객으로 간 결혼식에서 이가 빠진 신부드레스의 지퍼

주검을 씻겨 저승 갈 노잣돈으로 살아가는 염쟁이의 이승

 

나는 여기에 살고 있지 않으며

하릴없이 빙판을 쏘다니는 떠돌이

가끔 백 년 전에 내가 쓴 글을 해동하여 읽곤 한다.

-애지 2013년 여름호에서

 

 

 

이외현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물론 모른다. 그저 하늘이 준 목숨이라고 생각하며 죽을 때까지 살 뿐이다. 태어난 이유도 모르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을 우리는 살고 있다. 알면 어떡할 것이냐. 이유가 잘못되었다고 안 태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제 죽을 지를 안다고 해서 인생에 보탬이 될 것도 사실은 없다. 시작과 끝이 이럴진대 과정이야 무슨 대수랴. 기왕에 태어난 인생이니 아름답게나 살아보자는 것이 고작의 의미라면 이도 슬픈 일이다.

아름다움의 의미도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시대적이고, 아전인수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무어라 시비를 걸 일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눈이 일반적인 만큼 두 개의 눈에 보이는 것도 일반적일 것이라는 인식은 가지고 산다. 그 일반적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시인들의 독특한 사고체계라는 말을 하고싶어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일반성이 지니고 있는 힘은 거대하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방황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서 열리게 될까. 그 세계와 만나는 순간까지 시인들의 좌충우돌은 진행될 것이다. 설사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장종권(시인, 리토피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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