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석사거리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만월산 중턱 계곡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이름 하여 부평농장. 15년 전만 하더라도 입구조차 찾기 어려운 오지였던 한센병 집단 마을. 행정적으로는 간석3동인데 왜 부평농장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하여 찾아갔다가 A회장으로부터 마을의 역사를 듣게 되었다. 그는 부평농장의 산 역사요 증인이었다.

A회장은 청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중 1965년 15세 되던 해 발병하여 국립부평나병원이 있던 이곳에 홀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 후 가족과는 영영 생이별이었다. 병원에는 22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제법 많아 초등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다. A회장은 이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는 부평농장의 막내다.

1968년 정부는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을 신설하면서 산하에 있던 국립부평나병원을 폐지했다. 대신 정부는 중증 환자들은 소록도로 이주시키고 완치되거나 증상이 경한 사람들 중심으로 이곳에 자립촌을 만들었다. 병원 부근의 사유지를 매입하여 1인당 1필지씩 무상 불하해주었고 회원들은 협동농장 형식으로 양계와 양돈을 시작했다. 이렇게 부평농장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부평농장은 180여 회원들이 함께 운영하는 자치공동체이다. 현재 부평농장 사무실이 들어있는 건물이 당시의 병원 건물이다.

한센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에 돼지와 닭의 판로는 여의치 않았다. 자립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이곳을 준공업지역으로 전환하여 제조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직접 사업을 경영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장을 임대하기 시작하여 주택과 공장이 밀집해 있는 지금의 마을 모습이 형성되었다.

마을 가운데를 통과하는 도로와 나란히 굴포천으로 흘러드는 자연하천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버린 공장폐수가 굴포천의 오염원이었다. 지금은 복개하여 도로가 되었다. 부평농장은 도심에서 작은 제조업을 할 수 있는 곳이어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차츰 회원들의 생활도 안정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마을의 전성기가 지나고 이제 부평농장은 발전이 지체되고 낙후한 곳이 되었다. 개발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자 인천시는 도시계획을 변경하여 준공업지역을 해제하고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동산경기 침체가 발목을 잡고 있다. 세상을 뜨는 1세대 회원들이 많아지면서 A회장은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부평농장의 발전방안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땅을 팔면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아파트라도 지으면 평생을 부평농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회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서이다.

“어렵지만 잘 될 거요. 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느낀 것은 멀리 있는 사람보다 손잡아주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이요.” A회장은 살면서 손잡아주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면서 그 덕분에 사람 노릇하며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고 환히 웃는다. 나는 그 웃음 속에서 승화된 한(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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