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피

 

숨김없지, 피는 숨김없이 전부를 걸지 떨릴 때도 슬플 때도 숨찰 때도 귓불과 입숭, 손톱과 음순에 이르기까지 두려움 없이 달려가 피어나지 외길의 전방만 향하는 피는 병명도 설명도 없는 맹목盲目, 숨마다 걸음마다 쿵쿵 소리 내며 염천炎天의 햇발처럼 홧홧한 자국 남기지 처음일 때 문 열고 나오는 피, 끝일 때 문 닫고 나오는 피, 구멍마다 기어이 피어나는 피

-김박은경 시집 <중독>에서 

 

 

 

 

 

김박은경

2002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가 있다.

죽어있는 것들에게는 피가 없다. 피는 생명체만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피의 본질은 생명이다. 생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온몸에 실어나르는 것이 피의 역할이다. 외적 환경과의 접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피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래서 피는 완벽하게 본능적으로 작용한다. 피의 반응에는 거짓이 없다. 피의 반응을 숨길 수 있는 생명체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얼굴이 붉어지는 현상이나, 피가 거꾸로 도는 현상이나, 심장이 거칠게 뛰는 현상도 모두 피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피의 반응은 본능적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일부러 얼굴을 붉히기가 어렵고, 일부러 피를 거꾸로 돌리는 일도 어렵다.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고 본능대로 드러난다. 숨김이 없다는 말이다.

피의 반응대로만 살 수 있다면야 더 말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본능대로 살게 되면 자주 위험에 빠지게 된다. 세상은 본능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하느냐 라는 문제로 사회구성원리의 첫 단추를 삼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도록 요구한다. 가능한 한 본능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피는 여지없이 본능대로 반응한다. 생명체로서의 존재감은 이 피의 반응이 출발점이다. 피의 반응이 없이는 어떤 출발도 없다. 어떤 끝도 없다. 피는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 자신이다.

인천에도 부모의 양성을 사용하는 시인이 살고 있다. 개념은 다르지만 피의 뿌리에 대한 소중한 고집이다. 인천의 문학적 자존심을 키워줄 역량 있는 시인이 뜨거운 피를 끓이고 있다./장종권(시인, 리토피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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