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 쪽방들

속도와 정밀함을 위해 집적회로가 필요하다

구로디지탈 단지 근방의 쪽방들은

반도체만큼이나 정교하게 나누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방은 작게 쪼개져서

고밀도의 집적회로가 되어간다

방과 방을 치밀하게 잇는 골목은

신호가 돌아다니는 회로와 같다

소문들이 저항도 없이 순간에 퍼지고 나면

소문을 처리하느라 방들에서는 불이 켜졌다가 꺼진다

구로동이 디지털 단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게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쪽방들 때문이다.

쪽방촌은 미래의 반도체 기술을 상상하게 한다

구로 디지털 단지의 쪽방동네

여기가 바로 세계 제 1의 실리콘 벨리이다.

-계간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최종천

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고양이의 마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로 성장하면서 세상은 과거와는 견줄 수가 없을 정도로 발전한 모양새다. 보기에도 그만이고 편리함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게 정말 긍정적이인 변화로만 볼 수 있을 것인지 묻는다면 적어도 열 중의 한둘은 아니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척 보기에는 신기할 정도의 발전이겠으나 이 발전의 뒷곁에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숱한 상실들이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파묻어 버린 과거 속에는 발전보다 더 버리기 아까운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쪽방동네를 상상해 본다면 아마도 평면적으로는 조각조각, 그리고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는 답답한 동네라는 생각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곳은 마치 컴퓨터의 메인보드와 같은 모양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쪽방들은 긴밀하고 편리한 골목들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에서나 소통할 수 있는 작은 창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다가 수십 년을 통해 다듬어진 통로들이 보드의 회로처럼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속도와 어떤 통신이 더 필요할까.  

시인의 시선은 현대문명에 대해 마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발전하는 현대문명의 대열에서 밀려나버린 가리봉동 쪽방촌의 비애다. 그 속에 깊숙이 눅어있는 인간적인 소통과 기가 막힌 속도성에 대한 강렬한 추억이다. 그들은 결국 어디로 떠나게 될까./장종권(시인, 리토피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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