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국회 바다와 경제 정책연구회 대표

인터넷 민주주의와 담론의 심화

▲ 고성원 국회 바다와 경제 정책연구회 대표
무엇이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급기야 국정원 댓글사건 국정조사까지 거쳤지만 풀리지 않는 의혹은 여전하다. 인터넷 영역이 종종 자발적 참여와 자유로운 토론의 공간으로 곧잘 설명되곤 하지만, 반면에 조작과 왜곡을 통해 오히려 민주주의가 손쉽게 훼손될 수 있을 개연성을 이번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과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이 한번쯤은 필요한 시점이다.

인터넷이 여론조작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맹점 만큼이나,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심화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半)회의적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의 주장은 확연히 자유로와졌고, 실로 2천년만에 아고라(agora)는 그렇게 부활했지만, 단언컨대 민주주의는 그 이상 심화되지 않았다.

여가의 공간 인터넷에서 ‘놀이’에 몰입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론장을 만들어낸다. 무한경쟁에 기인한 높은 스트레스 지수, 공간적 집약에서 비롯되는 잦은 접촉 빈도, 다이나미즘이 넘쳐나고 휘발성이 높은 사회적 특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적 욕구의 일탈적 분출을 갈망하게 한다. 당연히 거친 언사가 난무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속에는 조직화된, 혹은 제도화된 미디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원초적인 감성이 묻어난다.

오로지 방법적인 면에만 국한해서 보자면, 사람들은 더 이상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할 필요도 없고, 치열한 사상적 고민에 빠질 이유도 없다. 이제 사람들은 그저 순간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딱히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도 그다지 많지 않다.

권위가 해체된 지점에서 유희가 난무할 수 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적어도 민주주의는 확연히 일상화되었다. 중요한 건 심화되지 않고 일상화된 민주주의, 사람들이 정치적 지지와 반대를 원초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상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토론’이기 보다 ‘유희’에 가깝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정치적 의사표현에 관한 ‘사회적 공론’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 사람들은 유희하고 자유롭게 떠들어대는 듯이 보이지만, 종종 그 “떠들어 댐”은 이미 사회적으로 규약되고, 취사선택된 대상에 제한되곤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더 많은 정보는 더 많은 정보를 은폐시켜 버린다. 하이퍼텍스트가 연상의 흐름을 이어가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도에 의해 잘 짜맞춰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소통이 활성화된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분명 확장되었지만, 담론이 제약된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그닥 심화되지 않았다.
 
정보사회에서 소통의 도구는 활성화되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는 사적 이익창출에 기여하는 도구로서 성격이 짙어졌다. 누군가에 의해 취사선택된 정보 이외의 사실이나 객관적 실재는 그것이 논의되지 않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미 ‘주어진 것들’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 졌다.
 
문제는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다.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이면에 있다. 신문이나 방송,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 어떤 것은 보도되고, 왜 어떤 것은 보도되지 아니하며, 왜 어떤 것은 크게 문제가 되고, 왜 어떤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한가?
 
통제된 담론은 지식을 규정하고, 규정된 지식(episteme)은 한 사회를 통제한다. 한 사회의 주도적인 담론은 다른 담론을 제한한다. 담론은 그 자체가 권력이며,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경제적인 권력작용들에 연관되어 금지하고 분할하는 외부통제의 권력을 행사한다.
 
담론은 하나의 놀라운 ‘배제’ 장치가 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다. 소수의 소박한 진실보다 다수의 권위에 지배되는 담론의 속성은 그 논리적 구성이나 진위여부를 넘어서는 외적 구성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권력장치임을 보여준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여지없이 담론은 형성되고, 담론간 투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발화자의 권위에 기인하는 대중의 편가르기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는 종종 하나의 언술이 그 사회의 공유된 이념을 거부할 때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권위는 담론을 통제하고, 담론은 대중을 규율화한다.
 
오직 아테네의 ‘시민’들만이 권한을 누렸듯이 부활한 ‘아고라’에서 담론을 지배하는 것 역시 셋팅된 아젠다에 대한 발화자의 권위다. 소외된 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발화는 쉽게 무시되기 십상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확장되었지만 민주주의는 심화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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