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자 시인의 첫시집 <도시의 원숭이>가 도서출판 리토피아에서 출간되었다. 작품은 4부로 구성되어 총 8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천선자 시인은 2005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했다. 막비시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천선자는 어둡고 무심한 세상 속에서도 섬을 만들고 등대를 만든다. 밝은 불빛으로 인간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는 스스로 징그러운 뱀이 되어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차가운 너의 몸에 똬리를 틀고 뜨거운 입김을 토해 내고 있는 뱀. 둥글게 몸을 말아 가슴이 따스(「둥글려보면」)한 시인이 토해내는 뜨거운 입김에 차가운 세상이 따스해지고 있다. 어둠의 강을 끌어안고 있는 아름다운 뱀. 시인은 어두운 삶을 살아갈 힘은 우리의 삶 내부에 있음을 믿고 있다. 비록 삶이 어둠의 강이라 해도 그 어둠을 끌어안고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는 것. 시인이 여정의 끝에서 찾아내고 있는 둥근 몸이 바로 삶의 시작이라는 것. 어둠의 강을 끌어안고 있는 뱀이 아름다운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권경아 문학평론가의 시집해설에서

 

시인의 말

내 마음의 양식인 마초더미 속엔 생명이 숨을 쉰다.

이슬방울을 먹고 자란 연잎의 부드러운 속삭임 있다.

여름내 웃자란 나뭇가지마다 많은 이야기가 열려있다.

어깨를 토닥이던 실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이 있다.

느림의 미학을 가르치는 달팽이의 강의실이 있다.

너무 먼 식탁 위의 마초더미, 손이 닫지 않는다.

바삭한 치킨과 치즈가루를 듬뿍 뿌린 피자의 유혹,

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과 콜라와 연인의 유혹,

사방림을 넘어오는 싱그러운 물빛 파도의 유혹,

군마를 타고 경마장으로 가는 발소리들의 유혹,

온갖 유혹들이 오래된 바람벽의 흙처럼 흘러내리고,

사각뿔로 돋아나는 일상에 젖은 마음 한 자락,

이리저리 나부끼다가 빨래줄에서 팔랑팔랑거릴 때,

너의 긴 한숨은 공허한 내면의 황량한 거리를 배회하던,

나른한 오후를 끌고 피안의 저쪽으로 간다.

감각을 잃어버린 감성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쯤,

솔내음 솔솔 나고 따끈한 공상이 아침저녁으로 피어난다.

쉼표와 도돌이표를 잘 지키며 하루를 되새김질한다.

헛바람이 드나들던 틈새를 꽉 채운 포만감,

너로 채운 나날은 가벼워지고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마초더미 속에는 인생의 쓰고 단 맛이 들어 있다.

시는 나의 마초더미이고 친구이고 동반자이다.

늙고 병들어도 주름진 얼굴에 핀 검버섯 꽃이 아름다울 것이다.

먼 훗날 마초더미에 묻혀 살아가는 나를 생각을 해본다.

다음날도 먹고 그 다음날도 먹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먹고,

질리도록 먹고 배터지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오늘도 열심히 마초더미를 맛있게 먹는다.

 

판콜A 씨

 주유소 마당에다 묵직한 복사뼈를 묻고 헐렁한 잔등에 슬픔이 차오르면 바람 장단에 흐느적거리는 스카이댄서를 지나 명인제약 앞을 지나간다. 타원형 캡슐 감기약의 조형물이 제약회사임을 말하고 그 속의 영점 오 촉짜리 알전구는 희미한 열꽃을 쫓고 독감으로 찾아와 밤마다 타오르는 불꽃으로 온 몸을 휘감고 헤어지자는 말 풀려있던 기억들이 종합감기약에 취해 몽롱한 거리를 떠돌고 피지 못할 열꽃,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봉인된 채 캡슐 속에서 알알이 흔들리고 있다.

 

 눈사람

 너의 꿈속에 나를 가두어버렸다.

내 마음은 밤나무가지 위에 걸어두고,

시간의 귀퉁이를 잡아당겨서 단번에 키를 키운다.

자유롭게 흩날리는데 밤 가시로 만든 모자를 씌우고,

달랑, 조그맣고 동그란 밤톨 하나로 입을 만든다.

단내가 나는 입 속에서 말을 할 때마다 밤꽃이 피고,

흐드러진 흰 밤꽃은 눈가루가 되어 무겁게 가라앉는다.

넌 또 다시 눈가루를 말아 흐늘대는 시간을 단단히 묶고,

난 조금씩 녹아내리는 발끝을 보며 또 밤꽃을 피운다.

너의 손길이 닿는 순간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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