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과학과 이데올로기

왜 다시 자본론인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과학과 이데올로기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독일관념론 철학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철학의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무게나 그 사유의 넓이 만큼이나 이후 헤겔철학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또한 광범위하게 나타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스펙트럼의 한 귀퉁이에서 이른바 ‘헤겔좌파’로 분류되는 청년헤겔학파의 유물론 철학자 포이에르바하(Feuerbach)는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을 주창해온 헤겔의 관념론 철학을 ‘종교적’이라고 비판하며 사변철학으로부터 유물주의 철학으로 이행하고자 했고, 이러한 그의 착안은 마르크스(K.Marx)와 엥겔스(F.Engels)에 이르러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로 완성됐다.

그리고 그 대표저작으로 꼽히는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Ludwig Feuerbach und der Ausgang der klassischen deutschen Philosophie)’에서 이들은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역사적이며 계급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감성적인 유물론이라고 비판하며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유물론’ 철학의 정초(定礎)를 다져 나간다.

“헤겔에서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라는 이들의 언명은 그 유명한 테제(these)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로써 종교적이고 사변적이며 관념적인 영역에 머물고 있던 기존의 철학은 비로소 치열한 현실과 실천의 영역에서 다시 출발하게 됐다.

이후 마르크스 저작의 정수(精髓)로 꼽히는 ‘자본론(Das Kapital)’에서 상품과 교환, 노동과 잉여가치에 대한 그의 논증은 그것이 결코 추상화된 사변과 선동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또 다시 관념으로부터 실천으로 끊임없이 지향하며 현실과 더불어 치열하게 논쟁하고자 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허위의식(false conciousness)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엥겔스를 기점으로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 Adorno), 하버마스(Jurgen Habermas)로 대표되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er schule)’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관계의 모순을 지속적으로 은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치부를 끊임없이 들춰내왔다.

철학으로부터 경제학으로, 그리고 다시 정치학으로, 현실의 불합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타개하는 데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과학, 은폐된 현실을 들춰내는 진실, 허위의식을 꿰뜷어 통찰하는 본질적 의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세상에 나온지 150여년이 지나 또 다시 경제적 불평등과 세습 자본주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프랑스의 신진 경제학자 피케티의 분석은 의외로 명료했고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람이 돈을 버는 속도 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과 ‘그러니 부유세를 부과하라’는 것.

1980년대 영국의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와 더불어 신보수주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미국의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부자감세’ 정책을 시행하면서 내세운 논리적 근거는 소위 ‘래퍼곡선(Laffer-curve)’이라 불리는 경제적 가설(hypothesis)이었다. 감세는 투자증대와 고용확대를 불러오고 결과적으로 세수는 더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 논리는 현실을 통해서 단 한번도 검증되지 않은 관념적 허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이 가설적(假說的) 논리는 30년도 더 지난 한국사회에서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부자감세’를 지탱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벌써 몇 년을 두고, 당초 정부가 기대했던 기업의 투자확대나 일자리 창출 효과는 여전히 미미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되레 ‘서민증세’의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