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동아시아의 20세기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냉전(冷戰)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 근대(近代)는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았다. 전지구적으로 20세기를 양분했던 제국주의와 냉전은 종말을 고했지만, 동아시아는 아직 미완의 근대를 살면서 냉전을 떨쳐내지 못했다. 동아시아의 20세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historical identity)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의 경험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동아시아의 20세기는 무엇보다 자본(資本)의 시대, 혁명(革命)의 시대 그리고 전쟁(戰爭)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일본을 필두로 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침략전쟁,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한국과 베트남의 민족내전(internal war) 같은 것들이 20세기 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역사과정(historical process)들이었고, 그러한 경험들의 중첩이 만들어낸 질서에 동아시아는 순응해야 했지만 끝내 새로운 질서(order)를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현상적으로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은 세계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달랐다.

문화적으로 ‘서구’와 ‘제국주의적 근대성’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온 지역,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됐고 극한의 냉전과 냉전의 극적인 종결을 목도하면서 반동적(reactionary)이며 대립적(antagonistic)인 질서의 역사성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버린 이 지역에서, 강요된 세계질서는 지역의 힘의 질서를 바꾸어 놓았고 달라진 지역의 권력구조는 그에 조응하는 지역의 인식적 구조마저 바꾸어 놓았다. 식민화의 경험을 겪으면서 지역은 스스로를 타자화(他者化)하는 인식에 이미 익숙해져갔고, 그러한 역사적 환경과 경험은 그 누구도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지역의 개별국가, 개별민족들과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

이 지역의 근대(近代)는 서구에서와 같은 계몽된 이성(合理性)이나 진보(進步)의 모습이 아니라 ‘문명화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탈로 점철되어 있었고, 동아시아의 내재적 발전은 쉽게 무시되거나 부정되었다. ‘근대(modern)' 혹은 ‘근대성(modernity)’의 이름으로 이식되어 들어온 ‘서구(西歐)’가 ‘보편성(universality)’의 지위를 획득하는 동안 ‘비(非)서구’에 속한 이들은 ‘문명(文明)’으로부터 구별짓기(distinction)되어 ‘특수성(particularity)’의 영역으로 전락해 갔고, 대개의 경우 그것은 종종 ‘야만’ 또는 '미개'를 의미하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인식적 기반은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하위체계에 위치하고 있던 일본(日本)으로 하여금 동아시아 식민체제를 자기합리화하는 의식(consciousness)의 기반을 제공했다.

중국은 불편해했고 미국은 환영하고 있는 종전(終戰) 70주년 아베(安倍晉三) 담화의 기본적인 인식구조는 여전히 ‘우월적 서구(the West)’가 만들어낸 ‘새로운 국제질서’에 빗대는 일관된 자기변명과 모호한 책임회피에 급급하고 있고,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의 대립적 질서가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경쟁으로 격렬하게 대체되고 있는 현실(現實)은 일본으로 하여금 여전히 반동적 역사의식의 굴레 안에 스스로를 안주하게 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끝난 후 전쟁의 책임을 냉전이 격화되는 현실(現實)에 묻어두려 했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거대 국가간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현실(現實)에 편승해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피해국가들의 역사적 상처를 더욱 깊게 후벼파는 일이다.

역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역사가 새롭게 읽혀야 한다. 근대와 냉전을 넘어 새롭게 발견된 동아시아(East Asia)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는 동아시아의 지나간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를 어떻게 셋팅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나온다. 지금은, 전쟁과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평화와 공존의 시대로 갈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할 시기다. 새로운 질서는 과거를 덮어버림으로써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매듭짓고 마무리하여 끝맺음함으로써 비로소 모색될 수 있다.

과거를 변명하고 과거를 회피하고 과거를 슬쩍 덮고 지나가려 하면서 끝내 과거(過去)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난 아베 담화는, 하지만 여전히 20세기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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