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역사인식의 식민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논리(內在的 發展論理)를 부정해왔거나 혹은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표출해왔던 일군의 역사학자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殖民地 近代化論)’의 논리적 기반 위에 있던 이들이 바라봤던 조선 후기사회(朝鮮 後期社會)의 모습은 발전이 정체(停滯)되고 타율(他律)적인 식민지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선사회의 역사발전을 새롭게 추동할 동력은 오직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자극(刺戟)과 이식(移植) 그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는 오히려 조선경제를 자본주의(資本主義)적 개방으로 인도하고 조선사회의 근대화(近代化)를 가속화하는 필연적 요소였다는 데 이들은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일본(日本)을 통해 서구(西歐)로부터 이식되어 들어왔으며, 근대(近代)적 공장과 학교, 각종의 사회제도들 역시 식민지배를 통해 비로소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역사적 사실(事實)이나 실증(實證)적인 통계적 데이터를 놓고 보면 이같은 시각도 굳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단편적이고 편향된 측면은 다분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었다면 조선사회는 끝내 봉건제(封建制)적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침탈과 수탈로 점철된 폭압적인 식민지배가 과연 ‘자본주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國家主義的 發展動員體制)를 특징으로 하는 1970년대 후발 산업화(後發 産業化) 과정에서도 한국의 개발독재적 예외국가(developmental dictatorial exceptional state)는 오히려 ‘억압에 기초한 배제와 포섭(exclusion and cooptation based on repressive)’을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분단과 전쟁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은 반공주의(反共主義)를 통해 사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율(規律)화하는 한편,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속에서 노동계급을 ‘수출역군’ 혹은 ‘산업전사’로까지 추앙하는 사회적 포장(包裝)의 이면에 기형적으로 통제된 노예적 착취구조를 수반함으로써 파쇼(facio)적 개발독재체제를 효과적으로 유지해 갔다.

한국의 산업화는 무엇보다 국가의 강력한 지도력(指導力)과 노동계급의 자발적 동의(自發的 同議)에 의해 압축적으로 달성됐다고 보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역사적 사실(事實)이나 실증(實證)적인 통계적 데이터를 놓고 보면 이같은 시각도 굳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단편적이고 편향된 측면은 다분하다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끝내 저발전(低發展)과 저성장(低成長)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배제와 착취로 점철된 파쇼적 군부통치는 과연 ‘반공주의’와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쉽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정말로 당혹스러운 일은, 식민지(植民地)로부터 분단(分斷)으로 연속 전화(轉化)하는 과정에서 독재(獨裁)로부터 억압되고, 착취되고, 배제되고, 소외되는 역사적 경험과 그 각인된 기억에 기인하여, 식민주의(植民主義)와 반공주의(反共主義)로 고정화되고 규율화된 의식의 암울한 그림자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짙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식민지배(植民支配)와 군부독재(軍部獨裁)에 대한 저항(抵抗)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명히 정당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친일(親日)과 독재(獨裁)에 대한 비판(批判)은 충분히 자유로와야 할 것이다.

사실(事實)에 입각한 균형(均衡)잡힌 시각 만큼이나, 사실을 해석(解釋)하는 비판(批判)적 시각은 반드시 필요하고 분명히 더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이고 표면적인 현상(現象)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있는 본질(本質)과 진실(眞實)이 역사에서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사회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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