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친YS계 44, 반YS계 48, 관망파 57’ 1992.3.29.일자 ‘한겨레신문’은 그로부터 닷새전 치러진 14대 총선(總選) 직후의 민자당 내 세력분포를 이와 같이 분석했다. 당시 집권 민자당의 원내 149석 뿐만이 아니라 원외까지 270명의 세력분포를 따져 봐도 친YS계 79, 반YS계 109, 관망파 82로 분류된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민정계-민주계-공화계로 나눠지는 당시 민자당 내 계파간 지역구 공천비율을 따져 봐도, 민정계 153, 공화계 30으로 분류되는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 직계가 66명이었던 데 반해 YS 직계인 민주계는 54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대선(大選)이 치러지던 그해 12월까지 여당 내 역학구도는 YS와 민주계에 대단히 불리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YS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당 지도체제 문제나, 이른바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파동’, 이른바 ‘수서비리사건’ 등에서 비롯한 공안정국 등 3차에 걸친 내부권력투쟁 국면에서 박철언 정무장관이나 노재봉 국무총리를 사퇴시키는 등 크고 작은 정치적 승리를 획득하기도 했지만,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민정계를 중심으로 YS에 대한 ‘용도폐기’가 다각도로 끊임없이 모색될 만큼 치열한 내부적 견제와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92년 총선은 YS가 당대표로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떠안고 치러야 했던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계를 비롯한 민정계의 끊임없는 흔들기와 공공연한 비토로 인해 정치적 입지에 위기감이 감돌만큼 극한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맞이해야 했지만, YS는 오히려 ‘대세론’을 통해 민정계를 와해하고 그 일부를 신민주계로 편입하는 정치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92년 3.24 총선 직후 YS는 당시 선거결과가 민주계 헤게모니 뿐만이 아니라 당의 헤게모니 마저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위기의식을 극대화함으로써 대립전선을 당 외부로 이전하는 한편, 정권재창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전략을 통해 반대세력인 민정계와 공화계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선거결과에 따른 인책론 국면을 전당대회 국면으로 전환하고, 당내 대선후보결정을 조기에 촉발함으로써 내부적 견제와 반대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국면을 창출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당시 민정계 주류의 YS 제거 계획은, 그것이 곧 민자당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점, YS라는 민주투사형 비판적 정치인이 집권당 대권후보로 결정되는 데 대한 시대적 전향성(轉向性),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지지로 인해 좌절될 수 밖에 없었고, 이같은 상황은 YS 정권의 성립을 군부세력과의 단순한 ‘야합’이 아닌 ‘집권당 내부에서의 혈투(血鬪)를 통한 쟁취’라고 평가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92년 대선과정에서 YS와 민주계는 군부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YS가 이른바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협약(political pact)을 기초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보장받음으로써 기존의 군부 지배블럭에 포위된 형태의 ‘영입된 대통령(outsider President)’으로 간주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한 최초의 문민정권으로 평가되는 YS 정권의 이러한 탄생배경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하고 전격적인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한편, 일제(日帝)와 독재(獨裁)의 잔재를 청산하는 ‘역사바로세우기’를 밀고 가는 동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1990.1.22. 이른바 ‘3당 합당’이 발표되던 그 순간, 온 국민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던, TV 화면을 통해 생중계된 그 어색했던 장면은 여전히 충격적이고, 그 배신감을 비난과 분노의 감정으로 표출해왔던 국민적 비판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YS와 국민과의 암묵적인 화해(暗黙的 和解)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이후 우리 역사과정에 가져온 전환(轉換)과 변화(變化)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생을 민주화에 바쳐온 YS. 그렇게 쟁취해낸 ‘87년 헌법’에 기초한 이른바 ‘87년 체제’를 사실상 개막했던 그가 ‘87년 체제’의 역사적 효용이 한계에 다다른 이 때, 비로소 영면(永眠)에 들었다. 한 시대(時代)가 갔다.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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