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인하대 강사)

조그만 파이(pie)가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조금 덜 배고픈 사람과 조금 더 배고픈 사람도 있다고 가정하자. 이 파이를 어떻게 나눠먹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까?

두 사람이 먹고도 남을 만큼 파이가 충분히 크다면 그나마 고민은 덜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파이는 그럴 만큼 충분히 크지 못하다. 그냥 똑같이 둘로 나눠 먹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덜 배고픈 사람이 조금 더 배고픈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옳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파이는 제한돼 있고, 파이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늘 그보다 더 크다는 데 문제는 본질을 두고 있다. 물론 그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과 권위를 누구에게 어떻게 위임하고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굳이 ‘힘센 놈이 먼저 먹어버리는’ 폭력적인 상황이거나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식의 약탈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어떤 배분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 본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일게다.

사회적으로도 자원(resources)은 한정돼 있고, 그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는 늘 그렇듯 대단히 본질적인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된다. 누구나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하지만, 그렇게 과열된 경쟁은 곧 갈등으로 비화되기 십상이고, 그런 과정에서 또 누군가는 경쟁에 뒤처지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상황마저 연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행정부와 국회, 여당과 야당 간의 줄다리기와 힘겨루기 속에 386조 새해 예산안이 통과됐지만, 그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갈등적 배분이 숨어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쪽지예산’이라 불리는 임의적 배분의 방식이 일견 고정화된 행정체계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틈새를 메워주는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자원의 불합리한 배분 또는 비합리적이거나 비효율적인 배분을 초래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에서 분명히 비판적이다.

문제는 정기예산이든 수시예산이든 아니면 부득이하게 쪽지예산을 통해서라도 ‘사회적 가치에 대한 권위적인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의 방식이 ‘사회적 가치에 대한 합리적인 배분(reasonabl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의 결과를 도출해야 할 테지만, 결과는 늘 그렇지 못하다는 데 현실적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민주적 합리성에 기반한 시장적 합리성을 획득해야 할 예산행정이나 가치의 권위적 배분과정을 통한 심사와 배분의 과정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반시장적이며 비합리적인 상황을 여지없이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한때 유행했던 이른바 ‘형님예산’ 같은 불편한 작명(作名)들은 반시장적이며 비합리적인 이같은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타당성검토, 투융자심사 같은 편성단계에서의 절차적 합리성이나 상임위와 예결위를 오가는 심사과정에서의 제도적 합리성이 이른바 ‘형님’의 ‘쪽지’ 앞에 손쉽게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시장적 합리성은 이미 무너져버린 지 오래고 민주적 합리성은 기대할 바 조차 되지 못한다.

그나마 그런 ‘쪽지’의 관행들이, 제도의 큰 그물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고 지원하는 촘촘하고 미시적인 안전망(safety net)을 구축하는 데 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수도 있지만, 관행적으로 ‘쪽지’가 바라보는 방향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또한 경험적인 현실이다.

국가예산은 한해의 나라살림이기도 하거니와 경제적 순환(economic circulation)과 복지적 배분(welfaristic allocation)의 중요한 자원(資源)이다.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이며, 그 나눠진 파이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런 점에서 분명히 민주적으로 합리적이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또한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시카고대학의 정치학 교수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의 정의는 공동체 내에서 자율적이고 방임적인 자원의 배분이 아니라 위임된 권위에 따라 정치적으로 고려된 자원의 배분을 말한다는 점에서 행정적으로 기계적이거나 시장적으로 자율적인 배분이 아닌 조정되고 협상된 타협적인 배분을 의미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그 배분의 결과는 사회적 공정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지향했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그나마 민주적으로 위임된 권위의 행사를 통해 배분의 합리성을 제고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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