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범죄다

 

▲ 고성원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혐오(嫌惡)는 범죄다. 다수로부터 소수에게, 강한 자로부터 강하지 않은 자에게, 가진 자로부터 그렇지 않은 자에게, 혐오는 대개 그렇게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고 전달된다. 단지 그것이 보편적이거나 사회적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혐오는 특정의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때로는 의도적으로 또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종종 묵살해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혐오는 그것이 표출되지 않더라도 존재와 구조 자체가 이미 폭력적이다.

나와 다른 것, 집단의 동질성과 동일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종종 내가 속한 집단의 안녕과 질서를 저해하고 위해하는 요인으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런 위험의 요소들은 원초적인 증오와 경계의 대상이 되곤 했던 것이 또한 경험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로부터 우리는 예컨대 홀로코스트(Holocaust)와 같은 역사의 불행들이 어떻게 잉태되어 왔는지도 여실히 보아왔다.

뿌리깊은 종교간 갈등이나 이념적 대립, 인종적 차별, 문명간 충돌 같은 대립적 요소들이 때로는 단일하면서도 첨예한 갈등의 양상으로, 때로는 복합적인 갈등과 충돌의 양태로 표출돼 왔던 역사의 경험들은 그렇게 상시적으로 존재해왔다.

5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역사상 최악의 총기사건이라 불리는 올랜도 동성애 클럽 총기난사 사건은 그런 점에서 소수자와 타자를 배격해왔던 이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 맥락이나 성격을 달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예컨대 ‘퀴어(queer)문화축제’를 놓고 특정의 집단을 사회적으로 배격하고 배제하고자 첨예하고 심각하게 연례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현상도 그 혐오의 깊이와 폭력의 정도가 이 사건과 결코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우리사회에도 혐오가 일상화되고 폭력이 만연되는 병리적인 현상은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다. ‘올랜도 사건’이나 ‘퀴어문화축제’와는 또 다르게, 이른바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는 난데없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는 현상 또한 우리사회가 타자에 대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보다는 배격하고 배척하려는 수준이 이미 상당한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젠더(gender)갈등’이 사회적으로 내재적이거나 잠재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것이 ‘혐오’라는 레떼르를 달고 집단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은 분명히 당혹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성관계는 없다(sexual relationship is impossible)”고 하는 라깡(Lacan)의 도발적인 언사가 아니더라도, 양성(兩性) 간의 차이와 차별과 근본적인 소통의 단절은 충분히 제기돼 왔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분법과 타자화된 문법으로 급기야 집단적인 ‘혐오’의 수준에 이르고 있는 현상은 분명히 병적(病的)이기 때문이다.

혐오(嫌惡)는 질병이다. 결과에 쫓기고, 무차별적인 경쟁에 내몰리고, 한계에 다다랐을 때, 생존의 위협과 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잠재하고 있던 사회적 불만은 그렇게 특정의 대상을 향해 적대적인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성장이 둔화되고, 소득이 저하되고, 실업이 증가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질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불투명해지거나 비젼이 상실될 때, 사회적으로 약자이거나 소수자이거나 타자화된 이들은 종종 사회적으로 적대(敵對)를 표출하는 대상으로 설정되기 십상이고, 그렇게 병리적인 사회현상이 심화될수록 내재적인 균열과 갈등과 대립의 양상들은 종종 폭력적이고 범죄적인 수준의 집단적인 혐오로 진화하게 마련이다.

혐오는 치유해야 할 사회적 질병이고, 근절해야 할 사회적 범죄다. 경쟁과 갈등을 완화하는 공동체 정신을 복원하고,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 사회적 차별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은, 특권화된 권력과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를 교정하는 것 만큼이나,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회적 토대(土臺)를 교정함으로써 사회적 공정성과 합리적 이성을 회복하는 데서 찾아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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