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동아시아, 균형적 외교적 판단이 필요하다

 

▲ 고성원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중국 농민들이 영국 상인에게 차(茶)를 내다팔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후의 사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동아시아의 거대한 제국 청나라가 영국 함대에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는 영국조차도 중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842년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무기력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체제(朝貢體制)와 중화질서(中華秩序)에 익숙해 있던 동아시아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비슷한 시기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는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강제 개항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웅장한 기선으로 구성된 미국의 함대는 도쿄만으로 진입했고 일본인들은 질겁을 하며 도망갔다. 중국 광저우 앞바다에서 아편전쟁이 있은 지 10여년만인 1854년 일본은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과 함포의 화력을 직접 목도했고, 그 위력 앞에 굴복했다.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미국 함선이 기항할 수 있도록 두개의 항구도 열어야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이 두개의 사건은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크게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개의 사건은 이후 동아시아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고, 이 두가지 사건으로부터 이후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소용돌이 속에 고스란히 빨려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기, 영국과 중국 또 미국과 일본의 부적절한 만남은 동아시아에서 전(前)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중국과 일본이 자본주의 제국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이래로 동아시아 각국은 급속하게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편입돼 들어갔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면직물과 일용잡품들은 일본 상인의 손을 거쳐 조선 농촌에 까지 광범위하게 퍼져갔다. 대신 조선의 농민들이 경작한 쌀과 보리, 콩 같은 작물들, 심지어는 소나 돼지, 말까지도 그 댓가로 치러졌고, 농민들이 빚더미에 올라앉는 일은 눈깜짝할 사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서구의 자본주의와 동아시아의 만남은 그렇게 ‘자본’과 ‘무력’을 매개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곧바로 동아시아 근대질서의 기반이 됐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적 국제질서는 그렇게 안착됐고,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국가들의 저항은 격렬하고 거셌지만, 정작 ‘제국’들 사이에서 서로의 영역을 넘보는 균열과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한 힘의 균형에 기반한 분절적인 국제질서는 견고했다.

견고했던 동아시아의 제국적 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지역질서로 대체된 근원적 계기는 ‘대공황’을 통해 만들어졌고 직접적 계기는 ‘2차 대전’을 통해 형성됐다. 이번에도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바꾸어놓는 계기는 자본과 무력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후 동아시아의 근대적 질서는 냉전적 질서로 급속하게 대체됐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이 이 지역에서 각축했고, 조선은 남과 북으로 양분됐다. 이들 간의 경쟁은 팽팽했고 대립은 첨예했다.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고 사회주의의 대안적 실험조차 막을 내린 상황에서도 이 지역의 대립과 경쟁은 여전히 끝을 모르고 진행해갔다. 평화적 지역질서의 조건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자본과 무력에서 힘의 균형을 놓고 이 지역은 아직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치지형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남중국해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패권갈등은 고조되고 있고, 일본은 군사적 무장이 가능하도록 헌법개정을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의 한반도 배치가 확정되면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을 양대축으로 하는 힘의 균형과 그에 기반한 이 지역의 균형적 지역질서는 균열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무력을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안보딜레마만을 가중할 뿐이다. 평화는 안보에 기반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안보만을 기반으로 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외교적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선 농민들이 일본 상인에게 곡식을 내다팔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후의 사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균형적 외교적 판단이 절실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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